[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한국의 서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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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7-24 10:31 조회1,8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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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무엇일까. 대상 유산인 9곳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대표적인 사립 성리학 학교이다. 등재 기준 중 첫 번째로 꼽히는 ‘OUV’(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대상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 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 “성리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했고, 정기적인 제향으로 학파의 결집을 도모했으며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신청유산이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을 꼽았다. 즉 16세기 서원들은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즉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안향의 옛 집터에 건립됐듯 서원은 제향인물의 연고지역에 자리 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
여기에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며,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 구역이다. 휴식 공간은 잠시 책상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
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 썼다.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 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서원의 기본골격은 비슷했다. 사당과 강당, 동·소재와 내·외삼문, 전사청(제수를 준비하던 곳), 장서각(도서관) 등의 부속 건물로 구성됐다. 강당이나 누각, 정자, 연못, 계류의 이름도 반드시 지었다. 그러나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강당의 경우 성, 중, 경, 의, 인, 예, 덕, 도,교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표방했고, 누각이나 정자는 연이나 매 등 옛 성현이 사랑한 꽃 이름이나 풍, 월, 산, 수자 등이 포함된 이름이 많았다. 이것은 서원이 학문과 덕성의 터전인 동시에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공간임을 알려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교육과 제향 외에도 장판각을 통해 책을 펴내고,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각 지방의 향약을 기준으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윤리에 어긋나게 행동한 자를 교화하는 기능도 겸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 발전과 서원유형의 정립 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서원 9개로 구성됐다”면서 “각각의 유산이 하나의 온전한 서원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향·강학·유식(휴식)및 교류 공간과 주변경관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또 16~17세기 건립된 신청유산들이 지금까지 원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보존·계승되었음을 인정했다. 특히 서원을 거쳐 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이나 문집, 기문(기록한 문서), 목판도 잘 보호·관리되고 있고, 제향의식도 창건당시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유네스코 세계위원회는 “세계유산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인 완전성(integrity)과 진정성(authenticity)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가 우리 불교 1000년의 문화 유산이라면, 서원은 유교500년의 문화유산”이라며 “사학의 공간과 선열에 대한 존경의 공간이 어우러진 문화 유산은 한국의 서원밖에 없다.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수많은 서원(909곳)이 설립되었는데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47개 사액서원은 놔둬라.”<고종실록> 1871년 3월 20일자)으로 대부분 없어졌다. 이번에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9곳의 서원은 16~17세기에 설립된 곳으로, 이러한 역사 속 굴곡에서도 살아남았고 비교적 일찍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원형을 잘 보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 교육 방법은 중국 제도를 따라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서울의 중앙 및 동·서·남의 네 곳에 세운 교육 기관<중학·동학·남학 및 서학>)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습니다. 진실로 좋은 일이지만 서원이 설치되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방의 큰 결점입니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을 세울 때 세상에서는 의심하였습니다. 주세붕은 뜻을 더욱 가다듬어 많은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물리쳐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했던 장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아마도 하늘이 서원을 세우는 가르침을 동방에 일으켜 우리나라가 중국과 같게 되도록 하는 것인가 합니다. … 사방에서 기뻐하고 사모하여 서로 다투어서 이를 본받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선왕의 자취가 남고 향기가 뿌려져 있는 곳. 최충, 우탁,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이가 살던 곳. 이런 곳은 모두 서원이 세워질 것입니다.
<퇴계 전집>
서원에서는 먼저 소학과 사서오경으로 근본을 갖춘 다음 가례, 심경, 역사책, 근사록, 사기, 격몽요결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을 두루 읽어 뜻을 넓혔다. 사기나 사장은 과거를 목적으로 설치된 과목이다. 이 과목은 조선 중기 이후 사람들이 관계에 활발히 진출함에 따라 중요 과목이 되었다.
▶ 소수서원(경북 영주. 1543년. 안향)
꼬불꼬불 죽령을 넘어 닿는 곳에 풍기읍이 있다. 여기서 소백산 쪽인 동북 방향으로 접어들어 가노라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이다. 최초의 서원이자 서원의 성지라 할 수 있으며,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1538~1593) 등4,000여 명의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낸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명명됐다. 이후 명종 5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됐다. 함께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 그 외에 노비를 하사받았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나라 때 주희(주자,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이 있던"여산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과 경 사상을 수용코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는 설립 동기가 적혀 있다.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 옛터로 안향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현재 서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는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서원의 건물은 전형적 서원의 구조를 따르지 않아 배치가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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