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한국의 서원’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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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7-31 11:41 조회2,4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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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서원(경남 함양. 1552년. 정여창)
남계서원은 문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들 만에 의해 설립(명종 7년. 1552)된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한 서원이라는 이유로 정유재란(1597)이 터지고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선조 36년(1603) 사림들이 나촌으로 이를 옮겨 다시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재건했다.
남계서원이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특별한 이유는 서원 건축물 배치의 전형인 전학 후묘, 즉 앞쪽에는 교육 공간, 뒤쪽으로 올라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이 있는 구조로 만들어 다른 서원을 건립할 때 남계서원의 배치형식을 기본 구조로 삼았을 만큼 ‘롤모델’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남계서원은 가장 먼저 조선시대 명현(밝고 현명함. 또는 그런 사람)을 모신 곳이기도 하며, '어정오경백편' · '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 옥산서원(경북 경주. 1573년. 이언적)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곳으로 지어졌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기(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 되는 기운)보다 이(만물의 이치·원리·질서)를 중시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됐다. 이곳은 선조 5년(1572)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설립했다. 그 다음해에 선조에게서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이곳은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 후묘(앞에는 서원, 뒤에는 사당)의 형식을 띄고 있다.
19세기 말 조정의 일방적인 근대화 정책에 반발하여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서명 상소인 만인소가 소장돼있다. 또한 한호(1543~1605. 한석봉)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편액이 걸려있다. 또 옥산서원은 많은 고서를 보유한 것이 특징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원본 9권과 이언적의 '수필고본' 등 많은 서적이 보관·보존돼 있다.
건축적으로는 서원 영역 앞에 누마루를 설치하여 회합과 휴식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서원에 누마루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 도산서원(경북 영동. 1574년. 이황)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에서 ‘대표선수’를 꼽으라면 도산서원이 아닐까. 도산서원의 시작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인 도산서당이었다. 나이 서른넷에 문과 급제해 관직에 처음 나선 퇴계는 늘 귀향을 꿈꿨다. 쉰일곱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4년에 걸쳐 손수 도산서당을 지었다. 퇴계는 현직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버슬을 버리고자 했다.퇴계는 벼슬을 사직하거나 임금의 명령에 응하지 않은 게 스무 번도 넘었다.
도산서당 자리는 본래 도공들이 살던 자리였다. 도공들에게 돈을 주고 옮겨가게 한 뒤에 그 자리에 서당을 지으면서, 퇴계는 ‘도공이 살던 산’이었다는 뜻에서 ‘도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말년에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자 인근의 문인들이 수 없이 찾아왔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면 도산서당이 ‘산속의 시장 같았다’라고 적은 기록도 있다. 퇴계는 세상을 뜨던 해까지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쳤다.퇴계가 길러낸 제자는 320여 명에 달했다. 조선 전체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영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에 양진암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이라 하였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 위에 '계상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퇴계 종택이 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퇴계는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하였고,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를 완성하였다.
도산서당 터를 찾은 기쁜 심정을 퇴계는 시 몇 편으로 남겼고, 도산서당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561년 11월에는 「도산잡영」을 썼다. 이 시에 붙인 '도산잡영병기'에는 서당 주변의 경개를 비롯하여 퇴계가 「도산잡영」을 읊은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퇴계는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더니,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인 1574년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란 사당과 전교당,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이듬해인 1575년 선조에게서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고,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됐다. ‘도덕적 순수성이 어떻게 현실을 이상 사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유교적 이상 사회라는 조선의 건국이념이 비로소 철학적 이론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퇴계가 있었고, 퇴계를 따르던 영남 사림이 있었고, 학파와 학맥을 잇는 도산서원이 있었다.
도산서원의 목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돼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이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이황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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