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한국의 서원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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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8-07 12:58 조회1,9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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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암서원(전남 장성. 1590년. 김인후)
이 지역 출신 문인인 하서 김인후(1510~1560. 인종의 스승이자 벗)를 추모하기 위해 선조 23년(1590)에 지어진 서원이다. 김인후는 이 땅에 유교가 들어온 이후 문묘(공자 사당)에 종사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 출신 인물이다. 이곳 역시 남계서원처럼 정유재란 당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재건했다. 이후 현종 3년(1662)에 '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672년에는 지금의 자리로 서원을 이건했다. 이 곳 역시 전학 후묘의 형태로 건물이 배치됐다.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필암서원에는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하고 있다.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족보다.
▶ 도동서원(대구 달성. 1605년. 김굉필)
달성 도동서원은 선조 38년(1605),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굉필은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를 제자로 뒀다. 또 김굉필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했다.
도동서원은 조선중기 서원의 배치 특징인 전학후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이 서원은 산기슭에서 북향해서 전면의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사우(사당) 출입문은 낮게 조성됐다. 제향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몸을 자연스럽게 숙이게 해서 엄숙함과 공경함을 몸소 느끼게 하였다.
도동서원은 1607년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의 명칭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를 의미한다.
▶ 병산서원(경북 안동. 1613년. 류성룡)
병산서원은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꽃뫼(화산)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3년에는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 존덕사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 14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지역 사림들이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이끈 서애 유성룡(1542~1607)의 학문과 덕행,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세웠다. 그리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한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그것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에서도 최고이다. 10리 길을 자동차로 갈 수도 있지만, 걸으면 낙동강과 풍산들을 두고 걷게 된다.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며, 낙동강 푸른 물에 흰빛 백구가 훨훨 날아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서원의 구조는 선현을 제사지내는 사당(존덕사)과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입교당), 그리고 원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동재, 서재)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부속 건물로 유물을 보관하고 문집의 원판을 수장하는 장판각,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그리고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으로서 누각과 뒷간(화장실)이 있다.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관리소인 고직사는 별채로 구성된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남북 일직선의 축선 상에 외삼문, 누각, 강당(입교당),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우고 강당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 강당 뒤뜰에 전사청과 장판각를 두며 기와돌담을 낮고 반듯하게 두른다. 사당과 강당은 구별하여 내삼문 좌우로 담장을 쳐서 일반의 출입을 막는다. 강학공간은 선비정신에 입각하여 검소하고 단아하게 처리하여 단청도 금하고 공포에 장식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당은 권위를 위해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을 그려 넣기도 한다. 누마루가 뛰어난 만대루, 고직사(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곳)가 있다.
만대루 : 만대루의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는 멀리서 보면 기둥 위에 지붕이 덩그마니 놓인,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부재와 장식적 공간을 극도로 절제한 건축의 멋, 바닥 평면과 기둥 높이 그리고 지붕의 물매 등 상큼한 비례가 눈 맛을 시원하게 한다. 건물 안의 인공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가 된 공간이다. 이 누마루는 유생들이 학문과 열정을 토로하며 우주 질서와 자연 순환을 탐구하던 성리학적 이상향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건물을 가까이 둠으로써 먼 곳의 풍경을 끌어오거나, 가까운 풍경을 밖으로 밀어내는 기교와 솜씨야말로 병산서원을 찾았다면 꼭 느껴봐야 할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수가 없으면 감정을 순화하지 못하여 사람이 거칠어진다. 산수란 멀리서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큰 포부를 갖게 하여 인물을 만들어내고, 가까이 대하면 심지를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서원이 산수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에서, ‘기다림’ 끝에 피어난 꽃에서 선비들은 올바른 세상의 이치와 삶의 방향을 찾았다.
그 유명한 <징비록>과 <군문등록> 등도 병산서원에서 출판 · 인쇄했다. 한국서원의 기능이 교육에서 공론장으로 확장된 사례에 속한다. 한국 최초로 유생 수천 명이 연명한 유소(연명상소)를 올렸고, 지역의 공론을 종합하고 산출하는 공론장의 기능을 수행한 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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