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한국의 서원’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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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8-14 11:35 조회1,8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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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성서원(전북 정읍. 1615년. 최치원)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 때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1491~1554)을 모시고 제사 지냈던 서원이다.본래 태산서원으로 불렀다가 숙종 22년(1696) 무성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최치원은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1등)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ㆍ불교ㆍ도교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신라시대 대문호이며 정치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신라 정강왕 1년에 태산군수(지금의 태인)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에 월연대(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사우(사당)에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모셨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를 비롯하여 강당, 동·서재, 사우, 비각 등이 있다.
무성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향촌 교육과 연계되어 성리학의 가치를 보급하고 학문을 권장했다. 특히 마을의 자치규약인 향약과 관련이 깊어서 지역민 결집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을사늑약(1905년) 직후인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이곳 역시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건물 배치로 이뤄져있다.
이곳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연구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 돈암서원(충남 논산. 1634년. 김장생)
돈암서원은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 중 건립시기가 가장 늦다. 조선은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도 복잡해졌다.이런 과정은 자연히 그전에는 없었던 여러 현상을 수반했다. 종법(친족조직 및 제사의 기본이 되는 법)의 개념이나 상속과 제사의 범위와 절차 등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부분이었다.
중앙 정치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동서분당(1575년. 선조 8)으로 당쟁이 시작된 뒤 광해군과 인조 대를 거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 핵심의 하나는 ‘폐모살제(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라는 윤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내부적 변화와 함께 거대한 외부적 충격도 밀려왔다. 그것은 명ㆍ청의 교체였다. 조선 사회, 특히 그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중화질서의 몰락은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가져왔다.
예학은 엄격한 질서와 정교한 형식을 중시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특징은 이 시기의 이런 내외적 변화에 대처하는 데 적합했다.김장생(1548∼1631)은 이런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 예학 연구를 선도한 인물이었다.
돈암서원은 17세기 예학 연구를 선도한 사계 김장생을 배향하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됐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였다. 예학은 전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연구된 학문이다. 이곳에서 예송논쟁과 같이 국가정책의 중요 쟁점이 다뤄지기도 했다. 이 서원에는 김장생의 제자인 김집(1574~1656), 송준길(1606~1672), 송시열(1607~1689)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됐다. 이들 네 분은 모두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선대의 현인)서원이기도 하다.
김장생이 예론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보고, 그것을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시면서부터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돈암'은 서원이 창건되었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현재 서원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1.5㎞ 떨어진 곳에 있다. 돈암서원은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인 연산면 임리 74로 옮겼는데, 이는 원래 서원이 있던 자리의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와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 원년(1660), 임금에게 돈암이라는 현판을 사액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이후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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