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김혜수 “초등생 건물주 꿈, 취업난 뿌리엔…우린 어떤 어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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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21 22:00 조회1,4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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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스토리는 만들어도, IMF(국제통화기금) 협상 내용은 가공이 있을 수 없죠. 시나리오 받아 보곤 피가 거꾸로 솟았어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실체가 정말 너무하더라고요. 1997년은 우리 삶이, 가치관이, 양심이 왜곡된 선택을 하게 만든 결정적 시기였어요. 이 영화가 반드시 만들어져, 더 많은 사람에게 그때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97년 온 국민을 뒤흔든 외환위기를 그린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 28일 개봉)에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분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48) 얘기다. 영화는 IMF 구제금융 협상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운영됐단 사실에 상상을 보태, 국가부도까지 일주일여를 청와대‧금융권‧서민들의 붕괴하는 일상 풍경으로 재구성했다.
관료주의에 물든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은 예고된 위기를 국민 대신 정·재계 고위층의 동문들에게만 귀띔한다. 잇속 밝은 젊은 금융맨(유아인 분)은 국가부도 위기에 역투자해 인생역전을 꾀한다. “괜찮을 것”이란 정부 말을 믿었던 서민들은 그러나 사지로 내몰린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자 가장 갑수(허준호 분)의 운명이 이를 대변한다.
대부분 허구의 인물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이나 IMF 총재 등 실존인물도 등장한다. IMF가 협상안에 내건 조건도 눈길을 끈다. 영화는 대량해고로 인한 실업률과 비정규직 증가, 해외 투기자본에 장악된 금융시장, 빈부 양극화 등 오늘날 우리 경제가 앓는 몸살의 뿌리가 당시의 이 무리한 협상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국민한테 제대로 공개라도 했어야죠.” 21일 만난 김혜수는 이틀 전 언론 시사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곤 다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완성도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런 걸 떠나 우리가 영화를 만들며 굳게 먹었던 마음만큼은 지켜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의 어떤 면에 분개했나.
배우로서 97년을 기억하면. 주연 영화 ‘미스터 콘돔’이 개봉했던 해다.
한시현은 가장 먼저 위기를 예측하고 국민에 알리려 한다.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하고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할 배우론 김혜수밖에 없었다”고 제작자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는 말했다. 한국에서 드물게 경제 소재를 다룬 영화의 여성 주인공으로 다른 대안이 없었단 얘기다. 김혜수는 86년 ‘깜보’로 스크린 데뷔 이후 수십 편의 영화‧드라마에서 선 굵은 캐릭터를 도맡으며 대중과 호흡해왔다. 시선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자연스러움을 겸비한 그의 존재감은 이번 영화에서도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IMF 총재와의 장면은 어려운 협상 내용을 모두 영어 대사로 소화해야 했는데.
IMF 총재 역을 맡은 할리우드 배우 뱅상 카셀과 호흡은 어땠나.
영화엔 여성인 주인공이 90년대 남성 위주 관료사회에서 유리 천정에 맞서 싸우는 모습도 그려진다. 김혜수는 남성 소재가 주를 이루는 한국영화계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목소리를 내왔다. 3년 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영화 ‘차이나타운’에 이어 ‘굿바이 싱글’ ‘미옥’, 이번 ‘국가부도의 날’까지 여성 주연 영화에 잇달아 도전해왔다.
“20년 전엔 형식적인 레이디퍼스트는 있어도 여성비하 발언이 자연스러웠죠. 남자 상관이 말단 여성 직원에게 커피나 타오란 말을 해도 항의하는 게 이상했던 분위기였어요. 당시 금융조직에 한시현 같은 위치의 실무직 여성이 있었냐 물으니 없었다더군요. 남성형 권력구조 속에 그 정도까지 올라갔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청난 실력자란 설정이죠. 여성이란 걸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만의 원칙, 소신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익히 알려진 우리의 과거대로다. 그는 이런 가슴 아픈 시대를 거치며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영화가 답을 주진 않지만, 유효한 메시지는 있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때론 자신 없이, 때론 양심에 반하는 결정을 할 때도 있지요. 돌아보면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떤 지점에 있는 어른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보시고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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