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정몽주(1337~1392)와 정도전(1342~1398)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6-30 08:10 조회1,16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정몽주
정도전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다섯 살 위였다. 과거에도 2년 앞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한두 살 비슷한 또래가 아니라 다섯 살이나 많았다. 정도전이 목은 이색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을 때 정몽주는 이미 목은 이색을 대신하여 강의할 정도의 대선배였다. 정도전은 정몽주로부터 유학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큰 가르침을 받았으며, 나중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정몽주 선생과 출입을 같이하고, 그 뒤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보고 느낀 바가 깊었으니 선생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공민왕 때 성균관이 재건되어 같이 성균박사로 임명된 이후였다. 그 둘은 이인임 일파에 의해 친명 반원파로 몰려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그 당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마음을 같이 한 벗이여, 굳은 지조를 지켜 평생 서로 잊지 말기로 합시다.”
* 이인임(李仁任, ?~1388년)은 고려 시대 말기의 권신(權臣)이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고려 말 승려 출신 정치가)의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과 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실각하였다. 그는 이성계의 사위였던 이제의 백부이다.
정몽주가 명나라 사신으로 먼 길을 떠나야 할 때, 정도전은 귀양에서 풀려 방황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정몽주는 자기 서장관으로 정도전을 추천하여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로 인해 정도전은 종3품 성균쇄주 겸 지제고로 발탁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친명 반원파이며 유학을 통한 반불교 개혁파였으나, 스승인 목은 이색이 공민왕 사후 창왕을 옹립하면서 정몽주는 온건개혁파로, 정도전은 역성 혁명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 온건개혁파 : 고려 왕조는 존속시킨 채 개혁하자는 이색, 정몽주 중심의 세력
역성 혁명파 :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로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 조 준 중심의 세력
사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 것도 정몽주 때문이었다. 예전에 이성계의 조전원수(고려 후기의 군사 지휘관)로서 그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정몽주가 정처 없이 떠도는 정도전을 이성계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던가. 정도전은 이성계의 일급 참모가 되어 그의 역성혁명을 앞장서 도왔고, 그 과정에서 위화도회군,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정권 탈취, 고려조 붕괴와 조선 왕조 개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 왕조가 일어서는 데는 정도전의 힘이 컸다. 모든 일에 그가 힘써 큰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참으로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그러나 도량이 좁아 남을 시기하고, 또 겁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꼭 해치려 하고, 옛날에 감정을 품었던 사람에게는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예로부터 인군(人君,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제자(帝者)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인군과 신하가 모두 성인(聖人)이어서 서로 의견 대립이 없이 정사를 논의하여 화락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자(王者)가 다스리던 시대에도 군신(君臣)이 모두 현인(賢人)이어서 서로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융성하고 태평한 시대를 이루었다. 패자(覇者)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인군이 신하만 못하였으나 신하에게 전권을 맡겨서 일대의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패자(霸者) 이후의 정치에서는 재상이 전권을 가져야만 올바른 정사가 펼쳐질 수 있다고 보고 재상의 나라를 소망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 왕조 500년 가운데 가장 우뚝 솟은 혁명가요 큰 선비임은 분명하지만, 유학이라는 사상이 가지는 한계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우물 속에서 본 하늘이 전부인 줄 알고 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최후는 태조실록에 기록됐지만, 그 진실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경서는 다만 <주자집주>가 있을 뿐이었는데, 정몽주는 그것을 유창하게 경론(硬論) 하여 다른 이들의 의견보다 뛰어났다. 이에 사람들이 적잖이 의심하더니, 그 후 원의 호병문이 쓴 <사서통>을 구해 참조해 본즉 (정몽주의 강론과) 합치되지 않는 점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가 더욱 탄복하였다.』
<고려사>
『정몽주는 재질이 비상하게 높고 기개와 절개가 뛰어나게 호매(豪邁, 성질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나다)하며 충효 대절(大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을 지켰고, 젊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다. 당시에는 국가에 사고가 많고 정무가 호번(浩繁, 넓고 크며 번거롭게 많다)하였으나, 정몽주는 대사를 처리하고 큰 의문을 해결함에 있어서도 음성과 안색이 변하지 않고 이리저리 응답하는 것이 모두 실정에 알맞았다. 그때 풍속은 상사나 제사에 오로지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였는데, 정몽주가 비로소 일반 양반이나 서민들로 하여금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고려사>
포은 정몽주, 그는 예리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외교관 겸 정치가로서 우뚝한 이름을 청사에 남겼다. 쓰러져 가는 사직의 대들보로서 중원과 일본을 오가며 펼친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으나, 한편 성리학적 가치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 주었다.
주공을 따르고자 하는 이름에서 드러났듯이 그의 정신적 토대는 민족 전통의 것보다는 화이(華夷,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관에 가까웠다. 따라서 그의 개혁성은 근본적으로 보수적 성격을 띠었고, 요동 정벌을 반대하고 명에 대한 사대 원칙을 고수했으니 이른바 주체성과 진취적 전망은 모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쇠잔한 고려 왕조와 더불어 침몰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공교롭게도 같은 56세 나이에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흥미로운 점은 뒷날 이방원의 처사였다. 즉위 첫해에 이방원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를 만고 충신이라며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지만, 정작 정도전에 대해서는 만고역적으로 내몰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