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제생활 > 교육칼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제생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2-07 09:53 조회3,956회 댓글0건

본문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841_9473.png
* 삼국의 경제 활동 

 

 

 

○ 세(인두세)는 포목 5 필에 곡식 5 섬이다. 조는 상호가 1섬이고, 그 다음이 7 말이며, 하호는 5 말을 낸다.(고구려) <수서>

 

○ 세는 포목, 명주실과 삼, 쌀을 내었는데,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받았다.(백제)<주서>

 

○ 2월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 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백제)

 

<삼국사기>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국가에서 왕족, 공신 등에게 준 토지와 농민으로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으로 주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면서 조세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세는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집)를 나누어 곡물과 포(옷감)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15 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시책과 구휼(빈민·이재민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함)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또, 삼국은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여기에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 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 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삼국의 국제 무역은 4 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일본)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통하여 직접 교역하였다.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871_5926.png
* 고구려 귀족의 모습(황해 안악 안악 3 호분 벽화)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886_5253.png
* 고구려 귀족 저택의 주방(황해 안악 안악 3 호분 벽화)

 

 

 

○ 그 나라는 3 만 호인데, …… 그 중에서 대가들은 경작하지 않고 먹는 자가 1만 명이나 되며, 하호는 먼 곳에서 쌀, 낟알, 물고기, 소금 등을 져서 날라다 대가에 공급하였다.                                                                                                  <삼국지>

 

 

 

○ 대가들은 경작을 하지 않고 하호들은 부세를 바치며 노비와 같다.                                                                  <위략>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스스로 소유하였던 토지와 노비 외에도 국가에서 준 녹읍, 식읍(국가에서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 지역의 토지로서, 조세를 수취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토지와 노비 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귀족은 노비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리고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을 늘려 갔다. 귀족은 기와집,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집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보석과 금, 은으로 치장하였다.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932_0112.png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967_9671.png
* 철제 보습(서울 광진 구의동) 

 

 

898f18ab54d05816cace578f58e5a9cb_1549561977_7521.png
* 호미, 따비(서울 송파 몽촌토성)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묵혀 두어야 하였다.

 

 

 

농기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과 일부분을 철로 보완한 것을 사용하다가 4, 5 세기를 지나면서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다.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 농기구가 6 세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농민은 국가와 귀족에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는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지방 농민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거나 잡역부로 동원되었으며, 전쟁에 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은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몰락하여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교육칼럼 목록

게시물 검색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