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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국어, 한국사)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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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2-13 16:45 조회2,4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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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조선신사’라는 이름으로 남산에 세워졌고, 1925년에 ‘조선신궁’으로 불렸다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철거되었다.

 

일제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에 따른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숨은 뜻은 우리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조선교육령(1911)을 만들어 식민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하면서,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조선교육령 : 제1차 「조선교육령」과 이에 따른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국권 상실 초기의 식민지 교육방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② 우리 민족을 이른바 일본에 ‘충량한 국민’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며, ③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한국인에게 저급한 실업교육을 장려하였으며, ④ 한국인을 우민화(어리석은 국민으로 만드는 것)시키려고 하였다.

 

3 ‧ 1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를 바꾸었다.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규정하고, 경성 제국 대학(현재 서울대학교)도 설립하였다. 표면상 일본인 교육과 대등하게 보이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교육 차별은 여전하였다.

 

1930년대 만주 침략 이후에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의 협조자로 만들려는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 내선 일체(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와 일선 동조론(일제가 퍼뜨린 역사 이론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다는 내용이다. 즉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이었으니,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고, 한국사 왜곡을 심화시켰다.

 

언론 분야에도 식민지 통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3 ‧ 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 신문의 일간지와 일부 잡지 발행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신문에 보도할 기사의 통제를 계속하다가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 폐간시켰다.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특히.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종교 활동 역시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종교 교단과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3 ‧ 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이윤제, 최현배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나)와 비아(너)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신채호.<조선 상고사>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우리의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한편, ‘낭가 사상’(화랑도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였고, 그 밖에 문일평, 안재홍, 남궁억 등도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조명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다.

 

이 밖에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국외 유출을 막는 데 힘썼다.

 

간송 전형필(1906~1962) : 일제의 문화재 수탈에 맞서 만석꾼 재산을 오롯이 우리 문화 유산 수집에 바쳤으며, 1940년 보성중학교를 인수해 ‘교육보국’에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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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13세기) :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원(당시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일본인 골동품상으로 부터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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