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 조선 전기의 문학과 예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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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23 07:53 조회1,4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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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당대 문사들과 1명의 고승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이 곁들여져 있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만우, 최수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이들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의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까지 파악할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즉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거기에 곁들여진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 삼절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세종대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 화기
"안평대군은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였다. 작은 작품이라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꼭 후하게 값을 치르고 샀다.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 표구와 장정을 해서 간직하였다. 하루는 모두 꺼내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내 천성이 그림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10여 년간 넓고 깊게 찾아 이것을 얻었으니 놀랍구나. 만물이 이루어지고 무너짐에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짐에 이치가 있다. 오늘은 이루어졌지만, 뒷날 무너질 것이니 모이고 흩어짐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음을 어찌 모르리오. 옛날에 한유(중국 당나라의 문인ㆍ정치가<768~824>)가 홀로 외로이 살고 있음을 그림으로 남겨 자신을 스스로 보고자 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그것을 써주게나. (줄임)
이제 저 훌륭한 수장품을 보자. 동진 시대에서는 한 작가를 얻었으니 고개지(중국 동진의 문인ㆍ화가.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렸으며, 대상이 지니고 있는 생명 또는 정신의 표현을 중시하였다.)다. 박학하고 재주가 있으며 그림도 잘 그렸지만 재주를 깊이 감추어 그림은 아주 드물었다. 이제 수석도 각본(탁본)을 보니 좀체 찾기 힘든 정밀함과 화려함을 갖추었다. 엄숙하고 정연한 법도는 마치 모장과 서씨 같은 미녀도 늙었어도 그 아리따운 자태를 엿보게 해주는 것과 같다. (줄임)
무릇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는) 반드시 천지조화를 깊이 살피고 음양의 움직임을 참작하여 만물의 이치와 사리의 변화를 가슴 속에 가득 채워야한다. 그런 다음 붓을 잡으면 마음이 한결 같아져 저절로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인다. 무엇이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붓을 휘둘러 그대로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화가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에서 얻은 것이 손에 나타나 마음과 손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만약 조화가 자취도 남기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참으로 붓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수장품을 보면 맑고 깨끗하여 욕심없는 고상함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헌걸차고(기운이 매우 장하다.) 굳세며 힘찬 움직임은 우리 기상을 길러준다.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할 것인가. 나아가 사물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고 두루 두루 묻고 넓게 알게 하는 것이라면 시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여기에 이를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겠노라.”
<보한재집>
이런 글을 〔화기〕라고 하는 데 신숙주 문집인 <보한재집>에 실려 있다. 이 글은 신숙주가 1445년(세종 27)에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소장하고 있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썼다. 방대한 소장품에 대한 소개와 함께 화풍에 대한 평론은 조선 초기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글씨와 그림에 대한 안목을 보여준다.
〔화기〕에 나오는 화가는 모두 35명이다. 종류별로는 산수화가 84, 조수초목을 그린 것이 76, 누각 인물을 그린 것이 29, 글씨가 33으로 모두 222에 이른다. 북송 화가 작품이 가장 많으며, 특히 곽희 작품이 많다. 안견 작품 26점을 빼면 모두 중국 작품이다. 다만, 남송 화가인 마원을 원 화가로 분류하고, 유명한 원 나라 화가를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는 신숙주가 잘 모른 것이 아니라 조선 초 그림에 대한 수준이라고 하겠다.
<음악과 무용>
◉ 악학궤범
"악(樂)은 하늘이 내서 사람에게 보낸 것이니 허(虛)에서 나와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맥박을 뛰게 하며 정신을 막힘없이 흐르게 한다. 그런데, 감응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소리(聲)도 다르다. 기쁜 마음에 감응하는 것은 밖으로 나와 흩어진다. 화난 마음에 감응하는 것은 거칠고 사납다. 슬픈 마음에 감응하는 것은 슬프고 낮다. 즐거운 마음에 감응하는 것은 느리고 부드럽다. 다른 소리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 것은 임금이 위에서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바르게 이끄는 것과 거짓되게 이끄는 것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나며, 풍속이 번영하고 쇠퇴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악이야말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큰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악학궤범 서문>
조선 정부는 악을 정리하고 장려하였다. 악이 어진 마음을 키우고 더럽고 간사한 마음을 씻어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로 마음을 일으키고 예로 서며 악으로 이룬다.’ (논어 태백 8) 이 말은 예와 악을 함께 해야만 중용을 이룰 수 있고, 학문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가 악에 힘을 쏟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의 음악적 구조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계인 치(서양음 솔) 음계와 우(서양음 라) 음계로 되어 있으며 악곡의 구조가 완벽하다. 악기는 ‘등가’와 ‘헌가’라는 두 종류의 악대로 편성된다. ‘등가’는 댓돌 위에서, ‘헌가’는 댓돌 밑에서 박의 지휘 아래 연주를 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악기로는 대금, 당피리, 아쟁, 장구, 해금, 편경, 편종 등이 있다. 또 노래를 부르는 도창자가 있어 ‘악장’이라는 노래도 부른다. ‘악장’은 온통 한문투성이라 그 뜻을 알기는 어려우나 정가의 바탕이 된다. 종묘악에는 춤이 따른다. 화려한 붉은 옷을 입은 64명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을 ‘일무’라고 한다. 춤을 출 때는 왼손에 약(귀리를 상징함)을, 오른손에는 적(꿩의 깃)을 든다. 혹은 앞의 넉 줄은 검을 들고 뒤의 넉 줄은 창을 들고 추기도 한다."
<이성재, 국악 길라잡이>
* 일무 : 춤추는 사람 숫자가 가로 줄과 세로 줄이 같은 춤, 천자는 8일로 64명, 제후는 6일로 36명, 대부는 4일로 16명, 사는 2일로 4명이다. 약 적을 든 춤은 문덕을 찬양하는 문무(文舞)이고, 검 창을 든 춤은 무덕을 찬양하는 무무(武舞)이다.
종묘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첫 달과 나라에 기쁜 일이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이 종묘제례악이다. 중요무형문화재 1호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원래 송나라 대성아악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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