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운 조선의 으뜸 궁궐이다. 서울은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북), 관악산(남), 아차산(동), 덕양산(서)이 넓게 감싸고, 내사산(內四山)으로 주산(主山)인 북쪽의 백악(白岳), 안산(案山)인 남쪽의 목멱(木覓, 남산), 동쪽의 타락(酡酪, 낙산), 서쪽의 인왕(仁王, 인왕산)이 감싸 안은 곳, 그 너른 품의 넉넉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경복궁(景福宮)은 이곳, 서울의 중심인 백악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있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건국한 조선 왕조는 신하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대립과 궁궐터 선정에 관한 핵심 관료들의 분분한 의견으로 인해 초기의 천도 계획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천도 의지가 강한 태조는 새 수도 후보지로 거론된 계룡산과 신촌 일대인 무악, 그리고 백악산 아래 한양을 직접 둘러보며 적극적으로 천도를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395년 9월 25일에는 대체적인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이 창건(1395)된 것이다. 1394년 10월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12월 공사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궁궐의 규모는 전체 755칸 정도로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검소와 절약 정신이 반영돼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경복궁의 옛 모습 : 1896년 사직동 부근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이다. 사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의 지붕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서십자각이 보인다.
경복궁의 대문 이름은 광화문인데 광화문은 태조 4년 9월에 세워졌다. 창건 때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다는 것 말고는 밝혀진 게 없고, 세종의 부탁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 지었다. ‘광화(光化)’는 《서경》의 ‘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침)’에서 따온 말이다. ‘光天化日(밝은 세상과 안정된 시대)’의 줄임말로도 본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마감하고 밝고 안정된 정치로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통치자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빛(光)으로 화(化)해 만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빛으로 화할까? 그건 景福, 즉 햇살과 같은 복이다. 그러니 왕의 교지가 광화문을 나서는 순간 ‘사방에 널리 퍼져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邦)’는 뜻이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태조 이성계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다. 정도전은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할 것을 건의했다. 태조가 궁의 완성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술잔이 세 번 오간 것에 착안해, ‘시경’의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君子)는 영원토록 그대의 경복(景福: 큰 복)을 누리리라’는 대목을 인용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또한 ‘춘추’에서,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다면서, 왕이 된 자는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 만백성을 봉양하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민본사상의 구현이 새 왕조의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언급한 것이다.
정도전은 중심 전각의 이름을 근정전(勤政殿)으로 정했다. 그리고 ‘서경’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며 왕이 이를 수용해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든가, “주나라 문왕(文王)은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했다”면서, 부지런하게 정사를 베푼 성군의 사례를 소개했다. 부지런할 ‘근(勤)’ 자를 넣은 것은 왕이 이를 잘 계승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근정전
근정전의 보개(덮개 모양을 하고 있는 부분) 천장에 어우러진 황룡(칠조룡) 조각과 봉황무늬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을 일컫는다. 특히 근정전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시간과 공간을 수호하는 십이지신과 사신상으로 장식된 상·하층의 이중 월대 위에 세워져 법궁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근정전 북쪽 중앙에 자리 잡은 어좌(임금이 앉는 자리).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둘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