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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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6-23 18:39 조회68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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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힘 단상 2023년 6월 23일
여한이 없다
은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오늘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찻물이 끓으면 차를 우려 마시고 읽던 책을 계속 읽겠네.”
당황한 나그네가 다시 은자에게 말했다.
“아니, 내일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하잖아요.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면 그걸 왜 죽기 직전에 해야 하겠는가? 오래전부터 하고 있고 오늘도 하고 있어야지. 그걸 오늘 다 끝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어느 부부교사가 은퇴하고 나면 전원에 내려가서 살면서 텃밭도 가꾸고 일 년에 두 번씩 해외여행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만 남편이 암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아내는 너무 절망한 나머지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슬픔으로 탈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시골 내려가서 살며 가끔 해외여행 다니는 것은 거창하게 현재를 희생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부부교사라면 월급만으로도 사는데 부족함이 없고 퇴직 후에는 넉넉한 연금이 보장되는 직업이다. 전원생활과 해외여행이 현재를 얼마나 희생해야 되는 일인지 공감하기 어렵다. 남편의 죽음이 슬픔을 가져온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항상 남편과 함께 꾸던 꿈을 이제는 홀로 가야 하는 삶의 노정에서 오는 고통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절대로 지난 날들이 전원생활과 해외여행만을 꿈꾸면서 희생된 것이 아니며 과거는 과거대로 고귀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미래의 일들은 모두 다 성취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쉬움은 남아도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겸허함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이다.
‘말기 암으로 몇 달 안 남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물으면 곰곰이 생각한 사람들조차 아주 사소한 말 밖에 할 수 없다. 그 사소한 일들을 생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하겠다고 한다. 이제 죽을 날이 다 되었다고 하면, 세상이 종말이라고 하면 그제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겨우 사소하고 사소한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여행 가는 일이 일생일대의 거대한 과업일 수는 없다. 가고 싶으면 적당히 돈 모아서 죽기 훨씬 전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일이다. 은퇴하고 나서 나이 많이 먹고 난 다음에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여한이 없다’는 말은 한국인이 죽을 때 할 수 있는 최상의 마지막 말이다.
댓글목록
박지향님의 댓글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러게요.
마음이 있을때 그때 심으면 될것을 우리는 왜 종말이 올때까지 기다렸던 걸까요.
지금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해서, 전 오늘 나무를 심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