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 "트렌드 따라 패션쇼 했다 망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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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1-10 14:22 조회2,2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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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용·박지선 디자이너의 '블라인드니스'
독창성 돋보여 이번 시즌 '베스트 디자이너'
블라인드니스의 옷엔 남녀가 없다. 남자 모델이 오간자, 레이스, 주름으로 장식한 의상들을 입고 나오는데, 풍성한 드레스나 미니스커트인 경우가 허다하다. 부드러운 곡선과 날렵한 직선이 자유자재로 교차한다. 와이드 팬츠지만 긴 트임을 내고 리본으로 묶는 식이다. 얼굴엔 진주가 달린 마스크를 써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소매를 한 쪽만 달거나 양쪽 바지 길이를 달리하는 비대칭도 과감하게 시도한다. 한데 이처럼 파격이라 할 만한 옷을 만든다고 하기에 막상 두 사람은 지극히 평범했다. 또래 청춘들처럼 검정 데님 바지에 후드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나타났다.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는 날 것의 단어와 솔직한 표현들이 통통 튀어나왔다.
- 질의 :다들 독창적이라고 하는데, 모험이 아닌가.
- 응답 :
"원래 브랜드를 시작할 때 국내 시장에서 일단 돈을 좀 만들어서 뭘 더 도모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실제 온라인에서도 꽤 잘 팔았다. 하지만 서울패션위크에 나가다 보니 좀 많이 까먹더라. 2016년 가을겨울 시즌에 좀 '팔릴 법한' 옷들을 일부러 내놓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정말 하나도 안 팔렸다. 프랑스 편집숍 레끌레어 바이어가 쇼룸에 구경 와서는 '나는 여성복 담당이다'라며 거짓말을 하고 나갈 정도였다. 바로 깨달았다. 트렌디하게 팔릴 만한 옷이 성공하는 건 디자이너가 이미 유명해진 뒤에나 가능하다는 걸. 바로 그다음 시즌부터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대세에 맞게 만들어도 안 사갈 바엔 그냥 하고 싶은 옷이나 만들자고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반응이 왔다. 그 덕에 텐소울에 뽑히면서 파리(레끌레어)·밀라노(엑셀시오)까지 진출했다. 그때 망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신)."
- 질의 :처음부터 예술을 고집한 줄 알았는데.
- 응답 :
"패션은 순수 예술이 아니다. 트렌드가 엄연히 존재하고 세일즈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 마음대로 시도를 하는 건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서울에서만 쇼가 40여 개, 주요 패션 도시만 따져도 신인 디자이너가 넘친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걸 제대로 보여주자는 거다(신)."
- 질의 :그게 결국 뭔가.
- 응답 :
"트렌드에 반하지 않으면서도 옷을 풀어가는 방식에서만큼은 주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거다. 블라인드니스라는 이름 그대로 말이다. 젠더리스를 내세우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흐름은 이미 세계적 흐름 아닌가. 이걸 아크네 스튜디오처럼 미니멀하게만 풀면 쳐다도 안 볼 거다. 미니멀하면서도 장식적이고 페미닌한 요소를 가미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늬나 색깔만이 아니라 소재나 실루엣까지 다르게 시도해본다. 처음 생각 자체에 남녀 구분이 없는 거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 성이 달라 더 잘 적용되는 거 같다(박)."
- 질의 :정작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되나.
- 응답 :
"나는 미대(가구디자인과)를 나와서 어떻게 옷을 만드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냥 이런 그림 한장 보여주고 이런 무드였으면 좋겠어, 이런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어라는 식의 큰 그림을 그려준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른다. 진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나 할까. 그걸 규용씨가 옷을 만든다. 패턴이 나올 수 있는 건지, 현재 트렌드를 타고 갈 수 있는 건지 구현시킨다. 만날 '이거 말이 안 된다, 이거 못 만든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컬렉션은 거의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과정이랄까(박)."
- 질의 :패션 공부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합류했나.
- 응답 :
"개인적 스토리가 다 들어갈 만큼 이야기가 길다. 먼저 내 이야기를 하자면, 공대 다니다가 군대 다녀왔는데 영 적성이 아니더라. 국내 패션스쿨로 들어가 학교를 다니며 동창 두 명과 함께 이 브랜드를 만들었다. 판매는 잘 됐는데 서로 자기 브랜드에 대한 욕심이 있다 보니 2년쯤 됐을 때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충성 고객층이 있는 상태여서 브랜드를 접을 수도 없던 찰나에 소개팅을 했고 사귀게 됐다. 지선이는 대학 졸업 뒤에 뻔한 회사 생활이 싫다며 백수로 노는 중이었다. 어차피 일이 없으니 내 사무실에 자주 놀러 왔는데 그러다 일을 돕게 됐다(신)."
- 질의 :그러다 싸우면 어쩌나.
- 응답 :
"싸울 수가 없다. 둘이 옷도 만들고 바이어도 만나고 배송도 다 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 한 명도 없이 일하는 브랜드는 아마 서울패션위크 디자이너 중 우리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 브랜드가 굴러가려면 안 싸우는 게 답이다(박)."
- 질의 :직원을 못 쓸 만큼 돈을 못 벌었나.
- 응답 :
"지금은 그저 시작 단계다. 평가가 좋아도 해외 바이어들이 단박에 구매하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2~3시즌을 버텨내야 한다. 2018 봄여름 컬렉션도 3년짜리 적금을 깨서 했다. 이번까지만 해 보자, 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 무슨 직원을 쓰겠나. 우리 사무실이 도곡동 지하에 있다. 창문이 없어서 해가 뜨는지, 비가 오는지도 모르는 곳이다. 점심은 몇 년 째 동네 주민센터에서 먹고 있다. 자주 마주치는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뭐 하는 애들인지 많이 궁금해할 것 같다(신)."
- 질의 :그런 조건에서 올해 LVMH 프라이즈까지 도전했는데.
- 응답 :
"올 1월에 신청하면서 일단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지선이는 심지어 그게 무슨 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상 21명 안에 들어 준결승에 올랐고, 파리 LVMH 본사에 가보니 당황스러웠다. 브랜드별로 부스를 꾸며 심사위원들이 돌아다니며 채점을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같이 올라온 경쟁자들을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니 우리랑 상대가 안 되는 유명한 애들이더라. 심사위원이랑 후보자들이 이미 학교 선후배인 경우가 많아서 무슨 동창회 열린 줄 알았다. 그래도 거기서 칼 라거펠트도 보고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얘기도 나눠 보고, 진짜 꿈만 같았다. 나중에서야 우리가 참 당돌했구나 싶었다(신)."
- 질의 :정작 독창성에 관해서는 부담이 없나.
- 응답 :
"글쎄, 돈과 시간만 좀 더 여유롭다면 문제가 없을 거 같다. 해외 세일즈와 서울패션위크를 둘 다 하려면 정신이 없다. 가령 서울패션위크가 10월에 끝나면 바로 내년 1월에 있을 세계 남성복 컬렉션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려고 하고 이렇게 해도 안 되면 그건 재능이 부족한 거라고 생각한다(박)."
- 질의 :앞으로의 계획은.
- 응답 :
"아직은 브랜딩에 더 힘써야 할 거 같다. 작품이든 옷이든 무언가 만들 땐 설명과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시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검색어에 블라인드니스를 치면 '블라인드니스 망했나요'라는 게 연관어로 뜬다. 아주 예전에 우리 옷을 좋아하던 고객들이 질문한 거다. 지금은 홈페이지에 재고 조금 남은 거나 컬렉션 의상 몇 벌을 올리는 정도다. 어쨌거나 당장 닥친 건 다음 컬렉션이다. 우리가 얼마나 더 새로울 수 있는지, 또 한 번 부딪쳐 봐야겠다(신)."
[출처: 중앙일보] [인터뷰] "트렌드 따라 패션쇼 했다 망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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