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 백(百)화점보다 십(十)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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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1-22 13:14 조회2,6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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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쇼핑은 머리 아픈 숙제가 된다. 방대한 규모의 물건들 속에서 내가 찾는 ‘괜찮은 물건’을 골라내기까지의 과정이 꽤 피곤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쇼핑을 하면서 ‘선천적 결정 장애’로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내 맘에 쏙 드는 물건이 없을 때, 차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100가지가 진열된 상점보다, 10가지라도 괜찮은 물건이 있는 곳에 가고 싶은 이유다.
물건보다 경험…가성비보다 가심비
삶의 방식 제안하는 라이프 스타일 편집 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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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엔 필요 없는 물건도 있다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에 위치한 리빙 편집 매장 인포멀웨어의 문은 숨겨져 있다. 주소를 하나씩 확인하며 찾아야 돌출 계단에 가려진 나무문이 눈에 들어온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매장이라 들어설 때는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것처럼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일단 들어서면 별세계다. 1940년대 영국 정보부가 비행사 탈출용으로 제작한 지도가 그려진 실크 스카프부터, 일본 작가가 만든 독특한 그릇, 태국의 한 마을에서 수공업으로 제작되는 소형 베게, 심지어 저지 소재의 속옷까지 약 50㎡(약 15평) 남짓의 매장 곳곳에 눈길을 끄는 다양한 물건이 놓여있다. 품목도 놀랄 만큼 다양하다. 리빙 소품은 물론 가구·의류·커피 원두까지 판매한다. 품목은 다양해도 각 물건의 분위기는 비슷하다. 단정하며 단순한 디자인이 대부분이고, 쓰임새 또한 확실한 실용적인 물건들이다. 숍을 운영하는 홍성찬 대표는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모았다”며 “직접 써보고 좋다고 느낀 제품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인포멀웨어와 같이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소규모 편집 매장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청담동의 1LDK, 한남동의 MTL, 신사동의 챕터원, 성수동의 더블유디에이치 등이 대표적이다. 식당이면서 각종 먹거리와 생활 소품을 판매하는 논현동의 굿사마리안레시피, 동네 슈퍼마켓이면서 잡화까지 취급하는 한남동의 보마켓도 이에 속한다.
공통점은 ‘규모는 작지만 품목은 다양하고, 해당 품목별로 소수의 선택된 브랜드만 소개한다’는 점이다. 가능한 선택의 폭을 넓고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기존 소매점과는 확연히 다르다. 말하자면 수많은 물건과 브랜드 중 특정한 취향의 것들만 선별해 소개하는 형태다. 품목별로 최대한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을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백(百)화점에 비교해 십(十)화점이라 부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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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라는 이름의 필터
시라타 대표가 언급했듯 십화점이 물건을 고르는 기준, 즉 필터는 ‘취향’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편집 숍 1LDK의 한범수 대표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나 묻자 “내 방 옷장 안에 들어있으면 하는 것들”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1LDK 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옷장을 마주하게 된다. 현재 ‘가장 주목할 만한 제품’들을 진열한 곳이다. 매장에는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의 일본 스트리트 스타일 의류를 중심으로 함께 매치하면 좋을 신발·가방은 물론 빗자루·거울·펜 등의 잡화까지 구비돼 있다. 1LDK는 일본의 주거 용어로 방 1개와 거실(Living), 주방(Dining), 부엌(Kitchen)으로 구성된 집을 말한다. 규모는 작지만 주인장인 한 대표의 집처럼 꾸며 놓았음을 의미하는 상호명이다.
편집 숍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숍의 정체성을 물으면 대부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리빙 편집 숍 챕터원꼴렉트의 김세린 팀장은 “그냥 챕터원스러운 것을 판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다만 특징은 있다. 챕터원의 김가언 대표는 “북유럽 디자인이 인테리어 시장을 장악했을 때, 그 외의 다른 것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브랜드가 바로 챕터원”이라고 했다.
바로 이 점이 기존 백화점과 가장 크게 차별되는 점이다. 규모가 크고 다양한 브랜드를 취급하는 백화점의 경우, 시즌에 맞춰 해당 브랜드의 모든 신제품을 진열하고 고객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다. 스타일을 제안하기보다 제품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장소로서의 개념이 크다. 반대로 십화점은 오너의 취향을 바탕으로 소수의 물건을 선택하고 역으로 트렌드를 제안하기도 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객을 설득한다.
트렌드 분석가인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최근 백화점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이런 취향 제안 능력의 부재에서 찾았다. 김 소장은 “과거 큰 공간에서 많은 물건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백화점에 갔지만 요즘은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 멋지고 세련된 물건의 모든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며 “단순히 여러 물건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 제품을 제안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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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식이 상품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상품을 팔고, 식당·커피숍·꽃집 등 다양한 기능의 숍들이 밀집한 ‘복합 공간’이라는 점도 십화점의 또 다른 특징이다. 2017년 12월 문을 연 논현동의 굿사마리안레시피는 유기농 식재료로 요리하는 식당과 같은 공간에 조명·가구를 판매하는 리빙 숍, 꽃·식물을 판매하는 플라워 숍이 함께 있다. 한남동에 위치한 MTL은 카페로 유명하지만, 실내 한쪽에선 의류·잡화 및 작은 가구 등도 판매한다. 청담동의 편집 매장 1LDK도 의류·잡화 등을 판매하는 매장 안쪽에 꽤 넓은 공간의 카페를 두었다.
모두 판매하는 상품 하나하나보다, 삶의 방식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공간들이다. 1LDK 한범수 대표는 “매장을 기획할 때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감도 높은 공간 기획과 연출은 오프라인 라이프 스타일 숍이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향은 성신여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다양한 볼거리·만질거리·즐길거리로 무장한 라이프 스타일 복합공간은 온라인 시장에 주도권을 뺏긴 오프라인 시장의 새로운 돌파구”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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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보다 마음을 움직여라
물론 편집숍이 유통업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특히 패션계에서는 무이, 쿤, 한스타일 등 이미 10여년 전부터 편집 숍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십화점은 이들과 같은 편집숍이면서도 더 진화한 2세대 편집 숍이라고 할만하다. 새로운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보다 깊고 뾰족하게 다듬어진 취향을 선보이고, 쇼핑 경험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진화했다.
개성 있는 라이프 스타일 숍이 점점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소비문화를 받아들이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기에 가능해진 일이기도 하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소장은 “예전에도 이런 작고 개성있는 라이프 스타일 숍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은 이런 시도가 받아들여 질만큼 소비 패턴이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보마켓의 유보라 대표 역시 “소득이 높아지고 사회가 성숙될수록 보다 다양한 삶의 방향이 존재하고 이를 인정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개성 있는 십화점에 대한 선호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십화점도 한계는 있다. 이향은 교수는 “라이프 스타일 숍이많은 사람을 유입하게 할 수는 있으나 결국 지갑을 열어 물건을 사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성공한 작고 개성 있는 편집 숍이 많은 일본만큼 ‘깊게’ 취향을 파고들 수 있어야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사동 리빙 편집 숍 챕터원에 이어 성북동에 챕터원꼴렉트를 론칭하고 오는 3월 또 하나의 편집 숍을 준비하고 있는 김가언 대표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는 “모두가 북유럽 트렌드를 얘기하고 인스타그램에 모두 같은 루이스 폴센 조명이 걸린 집이 등장하는 등 트렌드가 너무 빠르게 소비되는 요즘에는 계속해서 새롭고 다양한 트렌드를 제시하는 십화점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출처: 중앙일보] [강남인류] 백(百)화점보다 십(十)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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