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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연재소설] 비 온 뒤 무지개가 피어난다(최종회) - 해무(海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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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1-07 19:13 조회3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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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다 숨은 걸까?“못 찾겠다. 나와라.”를 외치면 기둥 뒤에서, 침대 아래에서 아이들이 고물고물 기어나올런지. 아이들이 허물처럼 벗어놓은 웃음소리와 발자국소리가 자욱했다.

그러나 현실은 깊은 침묵의 바다… . 봉놋방처럼 훈훈하던 둥지가 겨울 들판처럼 썰렁했다. 구멍 숭숭 둟린 가슴에 빈 바람만 들고 났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온종일 서성댔다. 장성한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나면 겪는 빈둥지증후군은 아닌지.

그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떠났다. 그네가 열렬하게 사랑할수록 더 빨리 그네 곁을 떠났다. 그네에게 사랑은 이별이요 기다림이었다. 사랑이라는 환상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그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의 술래로 남을 터. 이제는 그 끈을 놓으리. 사랑 따위는 기웃거리지 않으리. 누에처럼 고독한 옹성을 쌓고, 그 안에서 작은 꿈을 꾸리.

그네의 꿈은 영화였다. 유전인자가 그네에게 명령하는 것. 마그마처럼 펄펄 끓는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 영화는 엄마와 아버지가 그네에게 남겨준 유산이자 숙명이었다.

티테이블 위에 또아리 틀고 있는 인디 필름을 노려보았다. 열어보기가 두려웠다. 겨우 잠재운 불씨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 옆에 시집이 누워있다. 둘을 번갈아보며 망설였다. 하지만 둘의 뿌리를 파보면 설재희에 닿아있었다, 연리지처럼. 설재희가 왜 사막엘 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찾아냈는지 궁금하다는 핑계로 시집을 들었다. 영상보다는 언어가 덜 자극적이었기에.

차례를 훑어보다가‘불멸의 무지개’란 시제에 눈길이 멈췄다.

불멸의 무지개를 찾아/ 열사의 사막에 간다.//별빛마저 붉은/ 사막의 여명//  번민의 향불을 지피고/ 사막은 명상에 잠긴다./고행 나선 수도승처럼/태고의 숨결을 찾는 고고학자처럼// 한 방울 참회의 눈물을 얻으러/ 열사의 사막에 간다.// 달빛 포르스름한 / 사막의 밤// 새까맣게 타버린 번민의 재를 싣고// 낙타는 꺼떡꺼떡 사막을 건넌다./ 동면을 떠나는 짐승처럼/ 천형을 갚는 곱사둥이처럼// 이윽고/ 검은 무지개가 불멸의 사막을 지배한다.
 
번민의 재를 혹부리에 담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 그 위로 쏟아지는 검은 무지개. 두 컷이 화면 가득 떠있다가 휙 사라지고 나면 싯구가 시어로, 글자로 낱낱이 쪼개지면서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붉은 화염과 검은 재, 그 극간을 오가며 절망하고 고통스러웠을 그의 모습이, 그의 절규가 그네의 가슴을 쳤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글자들이 별똥처럼 우수수 졌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단 한 편의 시가 그네의 눈물보를 터뜨렸다. 외계문자처럼 연속적 의미가 없어 난해한 시가 엄마 잃은 후 꽁꽁 묶어둔 눈물보의 물꼬를 튼 셈이었다. 그네의 판단이 틀렸다. 아니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떤 영상보다 몇 줄의 시가 훨씬 자극적이었다. 언어의 상징성 때문일까. 긴 여운 때문일까. 그네는 밤새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몸 속에 그렇게 많은 설움이 고여 있었을가 싶을 정도로. 
 
“그래요. 그렇게 울어요. 눈에 눈물이 없는 사람은 영혼에 무지개가 없다네요.”

희끄무레한 빛 속에 그림자가 흘리듯하는 말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미안해요. 벌써 당신에게 얘기했어야 했는데.”로 그림자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당신의 무지개는 환상이 아니었어요. 리얼이었어요. 최소한 설재희와의 사랑만큼은. … 둘이  사막을 횡단…  별빛 …  영혼…  연소희… 참회의 눈물… 길을 잃고… 구조 요청하러… 실종… 마음의 빚…

바람 앞에 촛불처럼 파닥이는 의식 속에서 간간이 들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어차피 고백이란 양심의 티끌을 씻고자 하는 일방적 토로지 진정한 속죄나 무거운 형벌을  기대하는 상대적이고 형법적인 절차는 아니니까.

의식의 촛불이 희미하게나마 켜진 때가 아침이었다. 시계바늘이 8시를 가리켜 아침이지 창밖은 부우염하니 아직 몽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콥이 발치에 엎드려있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를 내려왔다. 침대가 흠뻑 젖어있었다. 간밤내 그네가 겪은 성장통의 흔적이었다. 묵은 껍질을 벗으려면 그네만의 동굴이 필요했다.

무작정 스튜디오를 나섰다. 안개가 그네를 덮쳤다. 가을 들판에 피어오르던 안개와 달리 낯선 도시의 농무는 음흉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허리 구부정한 가로등 안래 섰다. 미처 떨구지 못한 가로수의 눈물이 후두둑 그네의 등을 후려쳤다. 시원했다. 격정을 가누지 못해 방황하고 좌절하던 청춘을 후려갈기던 소나기처럼.

 바람 따라 안개가 모였다 흩어졌다를 일삼았다. 바이커들이 씽씽 운륜을 굴리며 그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저 질긴 생명력의 근원은 뭘까? 이 카오스 속에서 저들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바이커의 등판을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포세이돈이 뭉클뭉클 토해놓은 입김이 바다를 다 덮었다. 회색전선안개가 교각을 감고 다리에 납작 엎드리더니 다리에 올라선 바이커들을 한 입에 삼켜 버렸다.

해무였다, 해안선과 고충건물 꼭대기를 집어 삼키고 스카이라인까지 점령해버린 은색 괴물의 정체는. 이 신비우면서도 잔인한 괴물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바다에 추락하는 노오란 꽃잎들이 군무를 추는 꿈 속에서. 바로 그 놈이었다. 충격으로 그네의 몸이 기우뚱 했다.
“소희! 이제 그만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요.제발.”

하얀 포말의 소용돌이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그네를 밀어낸 것은 “제발”의 애절함이었다. 그네가 눈을 떴다. 그네의 멘탈 붕괴를 불러온 해무가 물러가고 있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다리를 땅에 튼실하게 박은 버라드 다리, 슬슬 도망치는 은빛여우의 꼬리를 잡고 달려오는 아이들, 그리고 그윽이 굽어보는 설재희인 듯 제이콥인 듯한 눈빛에 끌려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네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 결과 다음 해 늦은 가을, 그네는 밴쿠버 국제영화제에서 ‘해무(The Sea Fog)’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아직 그네의 순례가 끝난 건 아니다. 지금도 어눌한 눈과 누추한 걸음으로 헤매고 있을 것이다. 불타는 사막이든 깊고 푸른 심해든 가리지 않고 눈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채색 무지개가 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대미>> 

김해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06:06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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