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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기고] 손녀와 뛰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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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1-03 15:35 조회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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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와 같이 뛰려 나간다. 이제 아홉 살인데도 키도 나와 비슷하고 앞가슴도 도톰해 보이게 성숙하다. 

내주에 운동회가 있다고 연습을 하고 싶단다. 종심의 끝자락을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같이 연습을 하겠다는 마음이 고맙다. 

늦가을이라 캐나다 단풍나무 가로수들이 붉게 물들어 그지 없이 아름답다. 

이미 떨어진 갖가지 색깔의 단풍잎새들이 길가에 흩어져 있다. 

지나가는 우리들의 발 밑에서 사그락사그락하는 갈잎의 소리가 정겹다. 

단풍나무는 초봄 연초록의 움을 틔울 때도 예쁘지만 역시 ‘단풍”이라는 명성처럼 잎들이 하나 둘 단풍 색으로 물들어 갈 때가 제대로다. 

초여름 연초록 단풍 잎처럼 부드러운 손녀의 손을 잡고 도란도란 정다운 대화를 나누면서 운동장으로 걸어 간다. 

UBC대학 운동장에 도달하니 여러 학생들이 육상 연습을 하고 있다. 

손녀와 트랙의 가장자리 레인에서 뛰기 시작한다. 손녀의 뛰는 속도가 예상외로 빠르다. 

작년에 같이 뛸 때는 내가 속력을 낮추면서 보조를 맞추어야 되었는데, 지금은 나에게 좀 버거울 정도로 빠르다. 

어린 마음에 시발이라서 빠르겠지 하고 뛰는데 계속 빠르다. 운동장을 네 바퀴를 둘이서 열심히 뛰었다. 약 2킬로를 뛴 편이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잠시 쉰다.

한량없이 즐겁다. 팔순을 눈 앞에 두고 아홉 살 손녀와 오 리를 뛸 수 있다는 즐거움이다. 

손녀가 2킬로를 거뜬히 뛰는 그 역량과 빨라진 속력이 가상스럽다. 미처 예상치도 않은 버거운 도전을 해 냈다는 성취감도 감돈다. 

손녀에게 잘 뛴다고 칭찬을 하였더니 ‘80살에 할아버지만큼 잘 뛰는 사람은 없다’고 나를 추겨 올리는 그 심성이 고맙다. 

좀 쉰 후에 둘이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여전히 손녀의 뛰는 속력은 나에게 버겁다는 것을 느끼면서 열심히 나란히 뛴다. 

즐거운 마음이 열정과 힘을 북돋아 주는 모양이다.  또 네 바퀴를 뛰었다.  

손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였다.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운동장을 나온다. 손녀가 나의 손을 먼저 잡는다.  

정을 주고 느끼는 것으로 보여 고맙기가 한량없다.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서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들이 양켠에 아치를 이루고 있는 인도를 걷는다. 

손녀와 손 잡고 걷는 이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이게 손녀를 둔 행복인가 보다 하는 생각들이 뇌리를 여러 차례 스쳐간다.

집에 데리고 와서 간단한 간식을 먹이면서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어 보고 얘기를 나눈다. 

자동차로 손녀를 태우고 그의 집에 다려다 주고 돌아서니 마음이 허전하다. 

거리마다 즐비하게 늘어서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 가로수들은 하나 같이 예쁘다. 

사방은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있고, 옅은 구름이 깔려있는 서쪽 하늘에는 맑은 빛이 스러지고 있다.  

UBC 대학교의 여러 구기 운동장엔 야경을 위한 조명들이 밝혀져 있다. 

지금 막 떼어 두고 온 손녀 같은 젊은 얘들이 가지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 

다시 손녀의 얼굴이 보이고 오늘 한두 시간 소곤소곤 나누었던 정담들이 환청으로 들린다. 이 좋은 세상 이 아름다운 곳에서, 모락모락 자라는 손녀들과 이렇게 정을 나누면서 가까이 산다는 오붓한 행복감이 단풍잎 빛깔처럼 내연하고 있다. 

손녀들과 쌓아가는 정은 세월이 가면서 두터워지는데, 남은 세월이 얇아져 가서 마음이 저민다. 
 

권오율/ 사이몬 프레이저 대학교 경영대 겸임교수, 아·태경영연구소 교수연구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9-28 17:12:20 LIF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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