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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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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십창섭 작성일17-07-06 08:57 조회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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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연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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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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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임진왜란(1592~1597)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 ․ 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인조반정(1623,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한 사건)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 이를 정묘호란(1627)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키워 나라 이름을 청이라 고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 대책을 둘러싸고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대의명분에 따라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이 힘을 얻어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이를 병자호란(1636)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으로 피난하여 45일 동안 청군에 대항했으나,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결국 청에게 삼전도(현재 잠실)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삼배구고두’ 1637년 1월 30일은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로 기록돼있다. 임금(인조)이 오랑캐인 청 태종의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용포를 벗고 청의로 갈아입은 뒤, 항복을 했다하여 백마를 탔으며, 죄를 지었다하여 정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펼쳤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6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여성 인질들도 많았다. 훗날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화냥년)으로 폄훼(남을 깎아내리고 헐뜯음)됐다.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잃었다’는 누명을 벗었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였다. 청 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한편 청 태종은 1637년 1월  

 

  인조의 아들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10만이 넘는 포로를 잡아가면서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한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비가 바로 높이가 395cm, 너비 140cm에 달하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다. 쓰라린 역사의 상징이다. 비문(1009자)을 쓴 이는 병자호란 당시 도승지와 예문관제학을 역임한 백헌 이경석(1595~1674)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비신의 앞뒷면에 몽골, 만주, 한자 이렇게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청 태종의 덕을 칭송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1627년의 정묘화약 이후 우리(조선)가 화친을 먼저 깼음에 대방(청나라)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녘에 들어오셨다. 우리 임금(인조)이 위태로움에 처해 남한산성에 거하신지가 50 여일이 되었다. 관온인성황제(청태종)가 위엄과 법을 베푸는 도다. 황제의 공덕이 조화와 함께 흐름을 밝히니 우리 소방(조선)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뿐이로다. 처음엔 미혹하여 이를 알지 못하다가 황제의 명(命)이 있으니 잠을 깨었도다. 이에 오직 황제의 덕에 의지하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 다시금 우리에게 농사를 권하니 삼한(三韓)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이로다] 

  즉 삼전도비문의 내용은 조선이 청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가 다시금 청 태종의 은혜를 입어 깨우침을 받고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그런 맥락이다. 현재 삼전도비가 서 있는 오른 편에는 비석이 없는 ‘귀부’ 기단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요구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비석 없이 남겨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를 곱씹으며 두 번 다시 그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삼전도비가 전해주고 있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국제 정치에서는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하다는 점과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백성들은 정부가 청에 항복한 사실을 알면서도 청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으며, 여러 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청에 패배한 인조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과 함께 항복 문서를 청태종에게 바쳐야 하였다.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예조 판서 김상헌이 문서를 작성해야 하였지만, 청을 오랑캐라 여겨 온 김상헌은 항복 문서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최명길이 문서를 완성하였다. 최명길의 글을 읽은 김상헌은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문서를 찢어 버렸다. 그러나 최명길은 묵묵히 찢어진 종이를 모으며, “찢은 사람도 충신이고, 주워 모아 다시 쓴 사람도 충신”이라고 하였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라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하고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죽으면서 북벌의 움직임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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