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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임진왜란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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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08-03 08:59 조회5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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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임진왜란과 이순신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삼포(부산포=부산, 염포=울산, 제포=창원) 왜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삼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한 사건)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하였다. 그는 지방 영주들의 힘을 약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년 4월 13일).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전쟁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전쟁 초기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게 되자, 조선군은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기고(5월 2일),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6월 22일)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왜군은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1545~1598, 난중일기를 씀. 충은 백성을 향한 의리이고, 공은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한편, 육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농민이 주축을 이루고, 전직관리와 사림 양반, 승려가 조직하고 지도하였다)이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면서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란이 장기화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는 관군(정부의 정규 군대)에 편입되어 조직화하였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수군(1592년 7월.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하였으며, 관군과 백성이 합심하여 행주산성(1593년 2월. 권율의 행주대첩)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명과 경상도 해안으로 밀려난 왜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으며, 조선도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평상시에는 농사를 하고, 농한기<겨울철>에는 훈련을 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되어 동원된다)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천안)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함선 13척으로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9월 16일),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1598년(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와 경복궁 등 주요 문화재가 불타 버렸으며,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한편 왜군은 1인당 3개의 코를 할당받아 소금, 식초, 석회 등으로 방부처리한 뒤 1천개씩 나무통에 넣어 일본으로 실어 갔다. 코 영수증에 나타난 것만도 60여 만 개 이다. 그래서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 교토에는 9m에 이르는 귀 무덤이 있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하였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이삼평, 심당길, 박평의 등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참고로 가고시마 미야마는 사쓰마도자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의 심수관가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심당길이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구워내던 곳이다. 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에 이르러 사쓰마도자기로 빛을 보게 되는데, 이 도자기는 일본의 3대 도자기이자 세계 도자기의 명품으로 알려지게 된다. 심수관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때부터 '수관'을 가문의 세습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심수관가의 후예들은 일본에 정착한 지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도예 기술을 기반으로 한 단계 더 발전된 명품 도자기를 만들고 있으며, 일본인들에게도 추앙받는 세계적인 도예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읽어본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 분탕하였고 비전투원까지 학살하였다. (중략) 본래부터 일본을 이적시하던(오랑캐로 보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으로 그들을 더욱 멸시하여 적대시하는 국민감정이 뿌리박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의 의병장 등 열사와 논개를 비롯한 많은 사민(선비와 백성)·부녀자의 순절은 도의적 생활의 모범으로서 추앙되게 되었다.”  『한국사』의 관념적인 설명은 임진왜란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그에 견줘 『지봉유설』의 사실적인 기술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로 평가받는 대작으로, 이수광이 1614년(광해군 6)에 편찬했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못할 형편이었다.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 먹었으며, 시체의 골까지 뻐개 그 진물을 빨아 마신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었다. 쌓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으나 거두어 장사지내주는 자가 없었으며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아먹었다.”

<사진 설명>

* 사진 1 : 임진왜란 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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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 관군과 의병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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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 도조 이삼평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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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Digo님의 댓글

Digo 작성일

상상해보라 바다에 수백척의 왜선이 불을켜고
치러오는데 동래부사 송상현이 나라면
정발 장군이라면 비록 대장군일지라도 눈이

뒤집히고 다리가 휘청잉거다  속초에서 오징어잡이.배 한척이
온바다를 환하게 불비취고 있는걸 보고 왜선 수백척의.불빛을
연상했을때  그때 우리 선조는 어땠을까 했었다인간이닊니까
도망간 군인을 붙잡아와 읍참마속 못하고
수군으로 쓴 이순신의 입술.
남쪽보고 지금 불난 비씨의 밴쿠버연기처럼
군마의 연기비치면 압ㄹㄱ강너머로 튈 임금
일본도에 무처럼 짤려 지는 조선칼쥐고 꺼꾸러
지는 우라 오죽 못났으면 살상불가의 중들이
싸우며 막았는가. 수많은 전투에서 보면 대장이
일개 졸병보다 못하게 겁에질려 도망간게
한둘인가. 심수관이 14대에 이르러 동예의
그치에 이르건만 진짜 심수관의 나라 조선은
무엇울 했나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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