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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백두산정계비,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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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08-24 07:41 조회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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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백두산정계비, 간도

 

병자호란(1636)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청을 정벌하자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  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조선은 세종조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과 6진을 설치하였으나, 지형이 험난하여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고,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기에도 불리하였으므로 세조대에 4군을 폐지하였다. 더군다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규모 전쟁을 거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소홀해졌다.

  전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개간 사업이 본격 전개된 효종·현종대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북부 지역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다. 특히 1644년(인조 22) 청이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중원으로 들어가면서 이 지역이 비게 되자 주민을 이주시키고 읍치를 두어 강역으로 확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 하였다. 17세기 후반에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자, 무역 결재 수단으로 산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산삼은 주로 강계 등지를 비롯한 압록강, 두만강 상류에 집중 분포되어 있어 이 지역 농민들은 정부의 금압에도 불구하고 산삼을 채취하기 위해 월강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1712).

  비문에서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성지를 받들어 변경을 답사하여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1712) 5월 15일'이라 하였다.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쑹화 강의 지류)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청나라와 국경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는데 청나라 측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여겨 북간도 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토문이라는 지명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만주 용어로 지금의 쑹화 강 지류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당시 서북 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청나라와 국경분쟁에서 북간도 일대를 조선의 땅임을 재차 확인하였으나, 190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청나라로 부터 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면서 간도 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불법적으로 인정해 버렸다.

  간도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이 지역을 청국인도 조선인도 모두 입주할 수 없는 지역으로 정한 데서 유래되었다.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간도를 개척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간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말에서 고종 초부터였다. 세도 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이 관권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로 점차 이주하게 되었고, 1869년을 전후한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간도 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81년부터 청나라가 자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과 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인해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 영유권 문제는 한·청간의 외교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무순)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  에 넘겨주는 간도 협약(1909)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1. 한·청 양국의 국경은 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토문강 이북의 간지(개간한 땅)를 한국 사람의 잡거(여러 사람이 섞여 삶)구역으로 인정하며, 

  2. 잡거 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 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3.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4. 장래 지린(길림)·창춘(장춘) 철도를 옌지(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 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 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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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 백두산정계비(그래픽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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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 쑹(송)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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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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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 20세기 초 만주의 한인 이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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