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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 청나라 수출 이끈 효자상품 ‘치먼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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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작성일16-01-17 00:32 조회2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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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후이성에서 생산되는 치먼홍차는 인도의 다즐링과 스리랑카의 우바와 더불어 세계 3대 홍차다. 영국에서 꽃 피운 홍차문화는 중국에서 출발한다. 녹차를 즐기는 중국에 비해 영국은 완전발효 차인 홍차를 선호한다. 미국도 홍차를 좋아했지만 보스턴 티 파티 사건(1773년) 이후 값비싼 차보다 저렴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찻물이 붉은 홍차를 영어로 블랙 티(Black Tea)라고 부르는 이유는 차를 우리기 전 마른 찻잎의 색이 검기 때문이다.
 

중국 홍차의 대명사... 훈연향에 역한 맛 없어

치먼홍차 발원지는 차의 명산 황산

치먼홍차를 영국에서는 홍차의 여왕이라며 ‘블랙 퀸’으로도 부른다. 중국 홍차의 기원에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치먼홍차는 위간천(1850년~1920년)이 1875년 처음 생산한 정확한 기록이 있다. 아편전쟁의 후폭풍으로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된 중국은 양무운동을 추진했지만 경제 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쳐 국력은 나날이 쇠락하고 그나마 차(茶) 수출로 국가 재정을 메우고 있었다. 특히 수출 주력 품목인 녹차의 가격이 하한가를 칠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치먼홍차는 수출 효자상품으로 떠올랐다.

치먼홍차 발원지인 치먼현은 안후이성 남쪽 황산에 속한다. 1990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황산은 중국 명산 중의 명산으로 중국 10대 명차 중 3대 명차가 생산된다. 명나라 최고의 지리학자며 여행가인 쉬씨아커는 ‘오악(五岳)을 보고 다른 산을 모두 잊었는데, 황산에 올랐더니 오악마저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저서 「서하객유기」에 적어놓았다. 명산에서 명차가 나온다는 속설처럼 1000년이 넘는 황산의 차 재배 역사는 후이저우 문화의 한 축이다.

후이저우 문화는 티베트와 돈황과 함께 중국의 3대 지역문화로서 중원(中原) 문화의 뿌리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고 농경지가 적은 안후이성은 나라의 관리 아니면 상인이 되어야만 살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집안을 위시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홍무와 청백리의 표본인 판관 포청천도 안후이성 사람이다. 역시 안후이성 출신으로 청나라 군권을 장악한 북양대신 리훙장은 대륙의 근대화를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자강운동을 벌였지만 이를 정략적으로만 이용하려는 황실과 관료들의 저항으로 탄력을 잃고 말았다.

안후이성 이현에서 태어난 위간천은 일찍 고향을 떠나 푸젠성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9품 말단관리로 일했다. 1869년 봄이 되자 영국을 중심으로 서양 상인들이 담합해 차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해 수매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위는 낮았지만 중요한 보직을 맡은 위간천은 상인들을 독려해 저가 판매 거부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차에 부과하는 관세납부기일 연장을 상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푸젠성은 중국 최대의 차 수출기지답게 차로 생기는 세수가 엄청났다. 서양 상인들이 헐값에 차를 대량 수매하게 되면 나라와 백성 모두가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다. 세금의 상당부분은 해군력 증강을 위한 선박과 무기 구입비로 사용했는데, 세금이 줄어들면 밀무역을 감시할 해안 경비에 당장 공백이 생길 위기였다. 푸젠성에서 제일 큰 민족차상인 공이탕이 서양 상인들과 뜻을 같이한다면 악몽은 현실로 바뀔 판이었다.

때가 되면 외세를 몰아내고 부국강병을 꿈꾸던 열혈청년 위간천은 아편전쟁의 패배에도 국민영웅이 된 린쩌쉬의 사위 선바오전이 운영하는 공이탕을 찾아가 격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국력이 약해 관청도 서양 상인의 눈치를 보는 세태 속에 공이탕이 서양 상인들과 맞선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통쾌해하겠느냐?”며 “이번 일로 황제와 조정의 신임을 얻으면 홍정상인으로서의 지위도 오를 수 있다”고 선바오전을 설득했다. 위간천의 노력으로 서양 상인들의 담합은 무력화됐다. 해마다 차를 수매하는 계절이 오면 위간천과 서양 상인들의 파워게임은 긴박하게 전개됐지만 번번이 승리는 위간천의 몫이었다.


위간천의 아픔과 노력의 산물

1874년 초여름 일본은 대만을 침략해 강점했다. 조정에서는 선바오전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대만으로 파병했다. 선바오전은 믿음직한 위간천을 데리고 대만 탈환에 나섰다. 전장에서 어머니가 고향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위간천은 슬펐지만 귀향을 보류했다. 유교의 가르침인 ‘충과 효’사이에서 ‘충’을 선택한 그는 일본이 대만에서 물러난 겨울에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청나라 법은 부모상을 당하면 즉시 보고하고 귀향해서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시묘살이를 해야 했다. 이를 어기면 예외 없이 삭탈관직 했다.

불효자의 낙인이 찍힌 위간천은 배를 타고 안후이성으로 낙향했지만 차마 고향에 가지 못하고 배가 멈춘 첫 항구인 즈더현에 머물렀다. 그는 평생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모친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살았다. 차 유통시장에서 녹차 대신 홍차가 급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즈더현에 푸허창이라는 차창을 세워 푸젠성에서 배운 홍차 제작 기법을 접목해 새로운 홍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중국 홍차의 원조인 정산샤오종보다 훨씬 부드러운 훈연향을 가져 역한 맛이 없는 위간천의 홍차는 인기가 급등했다. 1876년 치먼현으로 진출한 그는 주요 차산지 5곳에 차창을 세워 산지에서 직접 홍차를 만들어 치먼에서 타지로 송출했다. 치먼은 홍차의 최대 집산지로 알려지며 치먼홍차는 중국 홍차의 대명사가 됐다. 131년의 역사를 가진 치먼홍차는 위간천의 전문성과 아픔 위에서 탄생했다.

영국 황실차로 인정받은 치먼홍차는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으며 중국의 대표 홍차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치먼홍차의 인지도와 무관하게 말년의 위간천은 쥐화산속 사찰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속세를 벗어났다. 치먼홍차의 흥망성쇠는 대륙의 운명과 함께 부침을 겪었다. 2013년 후난성에서 열린 중차배 경연대회에서 치먼홍차는 특등상을 받으며 중국 최고의 홍차임을 다시 인정받았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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