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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래 |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나는 왜 조리사가 되었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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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재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9-27 19:57 조회83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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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조리사가 되었나.(1)

 

나는 조리사다.1987 군제대하고 조리학원을 다니고 요리를 시작했으니 어언 30년이 다되었다.

지난주 산행에서 산우한분이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하게된 계기를 이야기해서 얼마나 재미있게 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운이 좋게도 딱딱맞기도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해서 나의 직업관이랄까 나의 조리사가 되게된 계기와 조리사로 살아온 나의 족적,다시 말하자면 내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이랄수 있는 나의 직업인 조리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요즘에도 티브에 조리사들이 나오면 사실 주의깊게 보게된다. 비록 그것이 쇼라고 하더라도 조리하면 고개를 돌려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나는 시골의 자작은 아주 조금이고 소작까지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니 농사일에 대해 모른다면 어불성설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많이 알지도 못한다. 보조하는 입장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일을 했으니 그런것 같다. 그래서 농고에 가는게 어떠냐는 중학교 담임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고 상고를 가고 상업도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직업훈련원에 가서 직업훈련을 받고 옥천에 농기계 만드는 회사에서 금형을 하면서 군면제 혜택을  받다가 공군에 자원 입대해서 항공정비사가 된다. 그리고 제대할즈음에 삼성과 대우중공업에 면접을 본다.그러나 결국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고등학교때 지방공무원 시험도 보고 군에서 1 부동산중계인 시험도 봤다. 모두 떨어졌지만,그리고 제대할때쯤 되어서 조리사 이론시험을 합격했지만 칼한번 잡아 본적없이 부산에 실기시험을 보러가서 떨어지고 제대후 상경해 누울수도 없는 칸막이 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조리학원을 다니고 그러고도 돈이 떨어져서 주점에 웨이터 알바를 하면서 학원을 마친다.

몇번의 낙방끝에 조리사 실기시험에 합격해서 처음으로 일하러간 신림동 사거리 양식당에서 숙식을 식당안에서 해결하는데 영업이 끝나면 사장이 식당문을 밖에서 잠궜다. 화장실을 밖에 있고 해서 우린 케찹통같은 빈깡통에 볼일을 보게 되었는데 여러 여건상 도저히 일을 상황이 아니라 판단해서 3일만에 그만둔다고 말하고 일주일만에 그만두고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학원에 다시 가서 취직시켜달라고 부탁을 하여 가게된 곳은 이태원 스탠드바였다.

소방서 골목은 밤이면 휘황 찬란한 네온이 뒤덮인 세상이지만 낮이면 초라하고 지친 모습이다. 저녁6시부터 영업을 시작해 새벽6시에 영업이 끝나고 주방위에 달리 다락방에서 자고 있노라면 찌는 더위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허리도 펴지 못하는 낮은 천장의 다락방에서 내려와 손님 소파에서 자는게 편할때도 있다.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경리아가씨와 함께 안주거리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영업을 시작한다. 손님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술취한 아저씨들을 예쁜 아가씨들 있다고 꼬득여 데리고 들어 오는 삐끼까지 했다.

 지하 나이트 클럼 웨이터들이 형님 나오셨냐고 인사할때도 나는 몰랐다. 사장이 갱두목이라는 사실을 영업전에 지하에서 들려오는 단체 몽둥이 찜질 소리느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3개월을 일하고 월급도 한푼 받지 못한체 그냥 벗어날 궁리만 하다가 예비군 동원훈련이 나왔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시골집에 한동안 잠적해 있다가 학원 동기의 소개로 프라자호텔 철도그릴에서 일을 하게 된다.

 군후배가 전병장(전꼽창이라고 불렀다고)이다하고 돌아 갔다는 얘기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듣게 되고 이주일씨가 오픈한 캐피탈호텔 지하의 나이트클럽에서 밤새워 춤추고 놀다가 아침에 바로 영업장에 일하러 갔던 기억이 있다.그리고 신사동 나이트 클럽에서 어우동쇼도 보고&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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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mond님의 댓글

Richmond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았는데 웨이터와 싸움이 붙어 주먹으로 벽을 쳐서 주먹만 엉망이 되던 일도 있었고 남한산성으로 단체로 놀러가서 울고 불고 해서 매니저가 아주 꼴통이라고 하던 그때엔 주방과 홀의 알력싸움 또한 대단했다. 늘 홀 매니저와 말다툼하던 주방 막내였던 내가 포스트 쿡이 내리치는 칼에 씽크대에 손씻으려 손을 디밀다 손가락을 아주 많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그리고 그 포스트 쿡은 주방장으로부터 ‘너가 그러고도 포스트 쿡이냐’면서 무쇠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맞게 된다. 나이트 클럽에서을지병원에 가서 마취도 안된 손가락에 아래에 양동이 대고 알코올을 붙고 손가락을 꿰매던 여자의사와 그걸 지켜보며 눈물흘리던 포스트 쿡… 그리고 난 창고에서 쉬는 신세가 되었는데 며칠후 갑자기 배가 아파 조리부 차장이 병원에 데려다 줄테니 기다리라는걸 참지 못하고 부천 자취방에 있는 의료보험카드때문에 부천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게 되는데 빈자리가 없어 서있으니 창백한 내얼굴을 보고 어떤 아저씨가 내앞에 앉은 학생을 호통을 쳐서 앉아서 가게 된다.
배가 금방이라도 터질것같이 불러 오는 느낌속에 부천역에서 내려 자취방으로 가지 못하고 대성병원으로 가서 진단한 결과 맹장염이란다. 다음날 수술하기위해 면도칼로 수술부위를 면도하던일 수술후 깨어 나질 못해 간호사들이 내빰을 때려서 깨어 나던일 수술후 통증과 예민함때문에 소변을 보지 못해 빵빵해져 가는 내 배를 보고 간호사가 화장실 물을 모두 틀어 놓고 먼산을 바라보라고 해서 소변은 해결이 됐지만 그때 바라본 보름달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시골에도 알리지 않고 추석때라 회사도 바빠서 잠깐식 들른 동료들.
그래도 늘 찾아와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았던 병원에서 이병원 맹장수술도 잘 못해 재수술 많이 한다고 성가병원엘 가지 왜 이병원에 왔냐는 말을 들었을때 당혹감이란…
양식당에서 우동코너로 메인키친으로 또 명절엔 열차식당 지원을 나가서 흔들리는 열차에 빼곡한 손님사이로 도시락을 팔러 다니고 열차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주방에서 밥을 해서 열차식당으로 나르고 숙소에서 잠도 한잠 제대로 못자고 또 동해로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그땐 얼마나 힘들고 힘들었던 시기였던지 하지만 지나고 보니 추억이다.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느날 주방장이 불러서 경희대학 지원서를 주면서 자기가 가려고 지원서를 가져왔는데 자기는 사정이 있어서 못가니 나보고 가란다. 학력고사 200점도 못맞았지만 연대 원주 캠퍼스 국문과에 지원했다가 아버지가 너 대학가면 난 농약먹고 죽을란다고 하는 바람에 가지 못한 대학을 다시 갈 기회가 왔다.
 회기역에서 걸어서 경희 한방병원 뒤편에 있는 그러니까 정문에서 좀 들어 가다 왼편에 있는 아담한 건물이었던 경희호텔경영전문대 야간에 현장경험자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게 된다. 월급을 모아서 등록금 하려고 하던걸 같이 일하던 동료가 빌려달래서 빌려 줬는데 학교 등록 마감이 되어도 안줘서 싸우고 가까스로 입학을 하게 된다.하지만 동료들의 질시랄까 오후에 학교를 가야 하니 아침조밖에 일을 못하는데 계속 불만을 털어 놓는데 왜 누구 하나만 특혜를 주느냐고 스케줄을 똑같이 돌려야지 않냐고…결국 그만두고 김포공항앞에 에어포트호텔이라는 곳에 일하게 된다. 집도 학교입학하면서  학교앞 산동네에 살게 되는데 연탄재를 마시고 죽다 살아나기도 하고 주소이전을 미쳐못해서 경찰의 임의 동행으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도 받게 된다.  날마다 최루가스에 집에 들어 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아내를 만난것도 이호텔에서 함께 일하면서 이다.아내는 한식주방장으로 왔고 난 양식보조였던때... 그리고 난 서초동에 오픈한 삼풍백화점에 수영장카페에서 일하게 되고 그 잠깐의  근무가 아주 오래 기억속에 남는 삼풍참사와 연관되어 늘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근무지가 되었다. 그리고 홍은동에  스위스그랜드호텔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에 문화사상신문사에서 기자교육을 받고 전문기자로 아주 잠깐 일하기도(겸업)한다. 글모음집 해바라기를 삽화까지 그려가며 발간한 것도 이때이다. 저녁에 수업시간에 졸음이 와서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공부하던 그때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 노력했던 그때다. 특급호텔이 새로 많이 생겨서 많이들 이동하고 나도 이동하려 했지만 여의치않아 계속 일하게 된다. 이때 리어카에 홀치기 장롱과 상하나 냄비하나 옷가지 책등을 싸서 이사하는일이 자주 있게 되고 학교졸업후  연남동에서 살다가 결혼을 앞두고 인천가좌동에 빌라를 사서 출퇴근 하게 되는데 출퇴근 시간만 4시간가까이였던것 같다. 결혼하고 바로 아이들이 생겨서 아이들을 낳게 되는데  임신중독과 신우염으로 아내를 포기하던지 아이들을 포기하라는 말을 인천 길병원 산부인과 과장한테 듣게 되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해서 다행히 아이들을 제왕절개로 낳고
아이들이 아파서 힘든 시기였지만 내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이기도 했던것 같다.
호텔에서 만든 케익을 특히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2주일에 한번씩은 호텔케익을 사갔던것 같다.
호텔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정치하고 똑같다. 누구라인에 줄서야 출세하고 취직을 위해 성상납을 요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까. 조리부장의 생일엔 의례 양주한병사가지고 가서 축하해 주고 꼬랑지를 흔들어야 진급하는 사회, 손님중에 조기교육으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에 아이를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이민을 결심하고 이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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