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낡고 오래된 아파트, 2030에겐 그리운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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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01 22:00 조회1,1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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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지난해 재건축이 확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주민들이 길게는 3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되돌아본 회고록. 1980년에 준공된 이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36)씨가 편집장을 맡아 2013년부터 펴낸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토대다. “사라지게 될 고향을 어딘가에 옮겨두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들었다는 그는 “사랑하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찍는 것 같은 마음으로 기록을 시작했는데 많은 분이 공감해주셨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실의 대상이 집인데, 이에 대해 애도하거나 얘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없었단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이번 다큐는 주거 공간의 풍경을 영상에 담아온 라야(29) 감독이 이인규 편집장과 의기투합,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신청을 받아 만들었다. 형식부터 독특하다.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여덟 가구 13인의 추억담을 목소리와 영상으로만 담았다. 할머니가 틈만 나면 닦아 반들반들한 마루, 딸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낡은 화장대, 아이들 키를 표시한 흔적 등 집집이 머금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동과 동 사이 아름드리 나무와 오솔길이 이어지는 풍경도 있다. 여름철 단수와 녹물, 난방문제처럼 해묵은 불만도 스스럼없이 들려준다.
라야 감독은 “부모님 세대는 주택이 집이지, 어떻게 아파트가 고향이냐. 답답하다, 천편일률적이라 하시는데, 같은 아파트도 누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매력이 다르다”며 부러웠던 순간도 털어놨다. “이토록 사랑하는 집이 있고 거기 태어나 쭉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살면서 이사를 여러 번 했거든요. 20, 30대는 사는 장소에 애착이 있으면서도 평생의 집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앞으론 또 어디 사나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요. 왜 우리에겐 그런 ‘집’이 없는가, 생각하다 엔딩을 배치했죠.” 다큐 말미에 토박이 주민은 “엄마가 고향보다 여기 더 오래 사셨는데 이제는 여기가 고향 같다고 한 것처럼, 저도 여기서 태어나 자랐지만 새로운 고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설렘도 있다”고 말한다.
아파트는 젊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홍성우(33) 작가는 지난달 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10’에서 그림책 『APARTMENTS』로 주목을 받았다. 20년가량 안양·서울·부천 등의 아파트에서 살아온 그는 문득 오래된 아파트에 시선을 사로잡혔다고 한다. “제가 지금 사는 곳처럼 20년 이상 된 아파트들은 대체로 외형이 화려하지 않고 무던하죠. ‘두부’ 같단 표현을 자주 쓰는데 노을 지면 노을빛이,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빛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아파트에 해가 들 때면 때때로 수백, 수천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절벽이나 계곡 같은 풍경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 그는 “아파트를 그린다는 걸 신기해하거나, 아파트를 흉물스럽게 여겼는데 제 작업은 정반대라 재밌다는 분도 계셨다”며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메시지를 전하려던 작업은 아니지만, 여러 반응이 기뻤다. 같은 대상에 다양한 관점이 생긴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아파트는 국내 주거형태의 60%를 넘어섰다. 아파트 키드가 특히 주목하는 건 20~30년 넘은 오래된 아파트. ‘아파트 덕후’를 자처하는 트위터리언 CDAPT, 과천 아파트 단지를 인스타그램에 기록하는 ‘과천기로커’ 등도 있다.
이인규 편집장은 “과천·고덕·개포 주공아파트에도 기록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파트들이 지어진 70년대 말, 80년대만 해도 용적률이 지금과 달랐고, 단지 내에 공원 같은 여백이 숨통을 틔워줬죠. 나무가 정말 많았어요. 다른 곳에 살아보니 도심에 이렇게 자연을 벗하는 주거 환경이 흔치 않다는 걸 알게 됐죠. 아파트도 90년대부터는 녹지가 건물 앞에 띠처럼 얇게 둘러쳐지고, 지하주차장이 생겨 나무도 깊게 못 자라게 됐죠. 1인 가구가 많은 빌라촌엔 그런 녹지마저 없어요. 우리가 누렸던 좋은 환경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면 인구절벽 등의 문제로 지금과 다른 삶을 기획해야 할 때 참고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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