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어! 내 핏줄 아니네” 그 나물에 그 밥 일일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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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26 22:00 조회1,1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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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초부터 현재까지 SBS·KBS2· MBC 지상파 3사가 방송한 일일드라마 14편(근현대사 배경 TV소설 제외)을 살펴본 결과, 식상하고 자극적인 설정이 약속한 듯 반복됐다.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불륜, 불치병, 살인(청부) 등이 대표적이다.
‘알고 보니 친부모가 아니었다’는 출생의 비밀은 최고 단골 설정. 14편 중 13편(93%)에 등장했다. 자신을 애지중지하던 어머니가 계모란 사실을 ‘뜬금없이’ 알고 충격을 받거나(KBS2 ‘차달래 부인의 사랑’), 손녀가 입양아란 사실을 20년 만에 알게 된 대기업 회장이 손녀를 쫓아내는(MBC ‘비밀과 거짓말’) 식이다. 불륜·살인도 각각 12편(86%)에 등장했다. 지난 4월 방송된 SBS ‘해피시스터즈’에는 불륜이 들통난 인물이 아내 지시에 따라 직접 내연녀의 자궁을 적출하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지상파가 이를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방송 기간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일일드라마는 보통 100~120회로 5~6개월을 한다. 한 달분을 사전 촬영하고 방송에 들어가도 작가는 매주 일주일 치 대본을 뽑아야 한다. 조금씩 밀리다 보면 ‘쪽대본’을 날리기도 하는데 그런 촉박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흔히 쓰는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같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30대 초반의 드라마 보조작가 얘기다.
막장 드라마의 요소에 비판만 있는 건 아니다. 일일극의 기원은 1920년대 미국 라디오 통속극(Soap opera). 가사 일을 하면서도 집중할 수 있는 단순한 플롯과 자극적 이야기가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주며 인기를 끌었다. 한 작가는 “연륜 있는 작가가 일일드라마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코 글 못 쓰는 분들이 아니다. 클리셰는 복잡하지 않게 몰입을 돕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며 “분명한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을 통해 오락적 기능을 수행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평론가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정말 악랄한 악인과 그 악인이 시원하게 단죄되는, 현실에서 보기 힘든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상대적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일일드라마 시청률은 3사 모두 하락 추세다. 지난해 초와 현재 작품의 최고 시청률을 단순 비교하면 KBS2는 23.7%(닐슨코리아)에서 15.7%로, SBS는 14.5%에서 10.3%로 떨어졌다. MBC는 비슷한 수준인데 ‘행복을 주는 사람’(10.9%)이 흥행에 실패한 뒤 ‘돌아온 복단지’(14.3%)와 ‘전생에 웬수들’(12.4%)을 거쳐 현재 ‘비밀과 거짓말’(11.5%)에 이른 결과다. 지상파 시청률의 전반적 하락 속에서도 일일드라마의 하락은 고정 시청층의 이탈이기에 위기감의 농도가 다르다.
지상파 3사는 서로 시간대를 비켜 일일드라마 고정 시청층을 ‘나눠 먹기’ 한다. 예컨대 오전 7시 50분 시작하는 MBC ‘비밀과 거짓말’ 재방송이 끝난 뒤 오전 8시40분 SBS ‘나도 엄마야’가 시작하고, 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 오전 9시 KBS2 ‘차달래 부인의 사랑’이 시작되는 식이다. 저녁 시간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특히 MBC는 지난 3월 개편으로 아침 드라마를 폐지한 자리에 저녁 일일드라마를 재방송하고 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일일극에서 반복된 출생의 비밀 설정이 계부·계모 등 재혼 가정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기도 했다”며 “일일극의 역할을 수긍하지만 하나 같이 선정적이고 폭력적 클리셰를 반복하는 방법론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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