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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문예정원] 만산홍엽(滿山紅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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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목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0-16 09:32 조회2,3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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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11월 중순의 지리산은 만산홍엽입니다.

가을은 절정에 다 달았습니다. 지리산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합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이루기 전의 모습입니다.


 지리산은 영혼의 광채로 빛납니다. 나무, 풀, 꽃들은 드디어 완성을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잎새 하나. 씨앗 하나에 이르기까지 제 모습 제 빛깔을 보여줍니다. 산 능선과 골짜기들은 단풍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산의 모든 것들이 마음을 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색채들이 어울려 환희가 되고 춤이 되고 노래가 됩니다.


하늘과 땅을 봅니다. 백두대간의 모든 산맥들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산은 붉은 신음을 토해냅니다. 제 일생으로 빚은 수백, 아니 수천의 색채들이 화음을 빚어내어 대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장엄한 노을 빛 연주입니다.


 천차만별의 색채입니다. 홍(紅), 적(赤), 황(黃), 갈(葛)이 있으며 홍에도 불그스름, 불그무레, 불그죽죽, 발그스레, 발그무레, 불긋불긋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붉은 빛깔의 향연입니다. 두 가지 색채들이 합해진 듯한 홍적, 황갈, 적황, 홍갈도 있습니다. 단풍은 감동과 포옹의 빛깔입니다. 얼싸 안고 일체감이 돼버리고 마는 순정의 색깔입니다.


 낙엽 한 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봅니다. 일생의 삶과 집중력이 물들어 있습니다. 햇빛과 물과 바람과 노래가 잠겨 있습니다. 식물은 신기한 생명시계를 지니고 있어서 햇빛과 계절에 삶을 맞춰가는 것일까요. 꽃이 필 때와 질 때를 압니다. 단풍이 들 때와 떨어질 때를 압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이 이르면 신음이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낙엽들이 발에 밟히며 소리를 냅니다. 나는 아름다움만을 보진 않겠습니다. 눈보라 속에 새싹을 틔운 인내, 폭풍 속에서 견뎌낸 시련을 보겠습니다. 별들의 반짝임을 보고 바람의 말을 듣겠습니다. 겨울잠을 준비하는 짐승들, 고치를 만들거나 잎사귀 뒤에 알들을 수북이 붙여놓고 사라진 곤충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풀 하나 나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이끌어 만산홍엽으로 불타게 하는 이 극치는 무엇일까요. 잎맥 끝까지 물들어버린 이 순간, 산은 깊은 명상 속에 빠져있습니다.

 산의 겉모습만을 보지 않겠습니다. 일생의 극점만을 보지 않겠습니다. 해체와 비움을 보겠습니다. 화려한 옷들을 벗어버리는 모습을 보겠습니다. 성장과 수식의 겉치레를 훌훌 벗어버리는 것을 보겠습니다. 만산홍엽만으로 적멸보궁에 이르지 못함을 알겠습니다.


산은 순수와 진실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모든 장식의 겉치레와 형식을 벗어버리고 고요히 나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비움으로 대 자유를 얻으려 합니다. 결별과 고독을 준비할 시간이 당도하였습니다. 고별사도 없이 떠날 시각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산은 채색의 아름다움 대신에 골격을 이루는 뼈들과 선(線)의 미(美)를 보여줄 것입니다. 비움의 선, 절제의 선, 알몸의 선을 보여줄 것입니다. 산은 북풍한설(北風寒雪) 속에 꼼짝없이 지낼 것입니다. 겨울 동안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만년 침묵 속에 잠길 것입니다.


 계절의 절정, 아름다움의 극치를 한 번이라도 맞이한다는 것은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만산홍엽이 아름다운 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절정을 이루면 머물지 않고 해체와 결별을 통해 자신을 비워버립니다.


 만산홍엽 속을 거닐며 머물지 않고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산이 넌즈시 말해 줍니다. 만산홍엽을 이루기도 벗어버리기도 어렵다는 것을. 가을 지리산에 와서, 나도 일생에 한 번 만산홍엽을 꿈꿔봅니다. 적멸보궁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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