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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한힘세설] 양산 영축산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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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06 09:29 조회2,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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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에는 저녁 늦게 도착했다. 해가 넘어간 통도사 입구 상가마을은 네온사인으로 휘황하고 호텔과 음식점이 늘비하다. 웬 노래방이 그다지 많은지, 절에 왔다가 노래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른 아침 호텔을 나와 통도사로 가는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내가 알기로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과 쌍벽을 이루는 길이 바로 통도사 소나무 숲길이다. 이 두 길을 고즈넉하게 걷다보면 행복감이 샘솟는다. 고요한 소나무 숲의 정기가 온전히 온몸을 감싸며 다가오면 저절로 선정에 드는 기분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등짐을 지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보살(여신도)들이 간간히 눈에 띤다.

 

통도사는 예전에 보았던 절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규모가 커지고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중후하게 보였다. 한국의 대사찰인 삼보사찰(불보 통도사, 법보 해인사, 승보 송광사)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일주문이 있고, 여기서 천왕문, 불이문을 연이어 만나고 마침내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한국 사찰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오랜 세월 여러 건물을 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도사는 부석사와 달리 평지 가람이라 오르막길이 없고 따라서 석축도 없다. 걸어 들어가기 편한 절이다.

 

통도사의 중심은 금강계단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것은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과 함께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자장(慈藏, 590년~658년)은 신라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 당시 왕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중국에 유학한 후 돌아와서 왕실의 후원으로 많은 사찰과 탑파를 창건하였다. 특히 부처의 진신 사리와 가사를 가지고 들어와 적멸보궁을 만들어 모셨는데 이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 통도사 금강계단의 사리탑이다. 금강(다이아몬드)은 모든 것을 부술 수 있으나 어떤 것도 금강을 깨트리지는 못한다. 금강은 반야의 지혜를 상징하며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낸다.

 

금강계단은 한국 최고의 불교성지이며 거룩한 불교유적으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통도사를 등재시킨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자유롭게 출입하고 예배할 수 있었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특정한 날 이외에는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금강계단 앞에 통도사 대웅전은 한국 사찰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건물이다. 우선 건물 모양이 정자(丁字)로 복합되어 있으며 건물 사면에 각각 다른 네 개의 편액을 달아놓고 있다. 금강계단 쪽으로는 ‘寂滅寶宮(적멸보궁)‘, 반대편으로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은 ‘大方廣展(대방광전)’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통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창을 내고 불단은 있되 불상은 따로 모시지 않았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은 능 앞에 있는 건물로 제사를 모시는 곳인데 한결 같이 정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통도사 대웅전을 살피면서 갑자기 조선 왕릉의 정자각이 떠올랐다. 7세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왕릉의 정자각은 이곳 금강계단 앞에서 부처의 진신 사리에 예불하기 위해 지어진 정자모양의 대웅전을 본떠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순천 조계산 선암사

 

늦은 저녁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니 인적이 고요하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한옥 민박집과 오리구이집이 줄을 지어 있는데 비철이라 손님은 거의 없다. 이곳은 유독 한옥이 많은 데 순천시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지었다고 한다. 방안 구들이 뜨끈뜨끈한 깔끔한 한옥에 잠자리를 정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개운하다.

 

숲이 우거진 개울을 좇아 얼마를 올라가니 길가에 장승이 손님을 반긴다.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인상이다. 내가 우리나라 절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불교는 자신의 교리를 떠나서 포용력이 강하다. 민간신앙의 장승을 절 입구에 세워 논 것은 그런 일면이 있다. 오래 전에 모교인 성균관대학을 찾아갔다. 역사학 교수로 있는 동창을 만나보기 위해서 였다. 담장 밑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장승을 새기고 있었다. ‘지금 몇 번째인지 몰라. 세우면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잘라버리고 그러면 다시 세우고 그런다네.’

 

선암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우리말로 홍예, 무지개다리라고 부르는 승선교이다.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는 보물 제400호로,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가는 아치 모양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다리이다. 이것은 역시 주변의 풍광과 잘 어우러져 다리 아래로 멀리 강선루가 보이는 것이 일품이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다리 아래 중앙에는 용머리 모양의 돌이 나와 있는데 동전 한 잎을 철사에 달아서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선암사에는 선仙자가 세 군데 쓰였는데 그것은 승선교, 강선루, 선암사이다. 선자는 사실 불교용어라고 할 수 없는 말인데 이 또한 불교가 그만큼 독선적이지 않다는 증표이다.

 

22대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자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여 순조를 얻게 되었는데, 뒤에 순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大福田’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 현판은 현재 원통전 건물 내부에 걸려 있다. 조선시대 불교를 탄압했다고 하면서도 왕실을 비롯해서 온 나라의 혈맥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선암사는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고, 1088년(선종 5)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재건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선암사는 천년고찰임에도 국보가 없이 보물만 4점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삼층 석탑이 양쪽으로 단아하게 서 있어 고적한 사찰의 정적을 지켜주고 있다. 선암사는 이른 봄이면 선암매가 유명한 곳이다. 11월의 빈 가지에 내년에 필 매화를 마음속에 그려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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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통도사 가는 소나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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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선암사 승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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