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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한힘세설] 사라지려는 조선 건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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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3-19 18:09 조회2,8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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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바야흐로 단행되려 하는 옛 동양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해 나는 지금 가슴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경복궁을 찾아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헐리게 된 데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잃어서는 안 될 한 예술이 사라지려 하는 운명에 대해 애도하는 글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을 만든 민족이 목전에서 그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나의 서글픈 감정의 피력이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그대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그대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을 것인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그대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짓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는 그대의 짧은 운명을 바로잡을 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 나는 그대를 기필코 불멸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우방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도시를 위해서, 특히 그 민족을 위해서 경복궁을 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우의가 해야 할 정당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광화문을 통해 가장 크고 중요한 건축인 근정전을 바라볼 날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 동양의 건축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방대한 양식의 건축, 즉 장차 총독부가 될 건물이 지금 그 바로 앞에서 준공을 서두르고 있다.

 

-어떤 기술이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그 대신에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는 죄 짓는 자 모두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싶다. 나는 그 증거가 되기 위해 지금 붓을 든 것이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말을 상기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못할 것을 하는 그 어리석은 죄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1922년 7월 4일 도쿄에서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33세에 일제가 허물어 버리려는 광화문을 안타깝게 애도하며 쓴 글을 요약한 것이다. 동년 8월 동아일보에도 게재 되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1916년 경복궁을 허물고, 정문인 광화문을 허물기로 하였다. 아무리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민족 자족심은 살아 있는 법인데 왕궁의 담을 허물고 정전인 근정전 바로 앞에 거대한 석조건물을 짓기로 한 것이다. 야나기는 말했다. 혹여 조선이 강대해져서 일본을 식민지화하고 천황이 머무는 황궁을 허물고 그 앞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다고 한다면 일본인은 어떠할 것인가. 가슴이 찢어지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힐게 분명하다. 조선인도 지금 마찬가지라고 했다. 결국 역사를 통해서 이런 야만행위는 일본인이 일본인답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통탄했다.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5년 창건되어 왕조의 정궁으로 쓰이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고종이 즉위한 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일제는 500여동의 경복궁 건물 중에 겨우 36동을 남기고 거의 다 허물어 버렸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일부러 경복궁 자리에 두어 일제의 식민통치를 확고하게 하고 조선 왕조와 조선인을 욕보이려는 심사였다. 그와 더불어 창경궁을 일개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으며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에는 그들의 신궁을 세우기도 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총독부 건물을 돌집이라고 격하하고 머리를 숙이기 싫다고 그 쪽을 향해서는 세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의 가혹한 지배아래 경복궁이 부서지고 광화문이 해체가 되어도 속으로 한이 될 뿐 특별히 항거할 방법이 없었다. 총독부 신청사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영구히 조선을 식민통지해 보겠다는 야망으로 10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고 1926년 완공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에 이 건물을 해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나왔고 이후 역대 정권에서도 거론되다가 김영삼 정권이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마침내 단행되었다. 이 건물(중앙청)을 철거하기로 하자 찬반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으며 지금도 불씨가 남아 있는 실정이다.

 

중앙청을 철거하려는 것은 광복한 독립국가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허물어진 경복궁과 광화문을 재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청 건물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았는데 어디에서도 파괴되던 경복궁과 광화문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단순히 중앙청 건물 자체를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만 따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흔한 주장은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라는 것이다.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치욕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건물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이다. 그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조선왕조의 국권을 상징하는 경복궁과 광화문이 야만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묵과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적인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을 철거하여 새로운 역사가 써진다는 것은 안중에 없다. 왜 치욕의 역사만을 고집하고 치욕을 씻어내는 새로운 역사는 역사가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창경궁이 그대로 동물원으로 남아있고, 남산에 신궁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중앙청 건물이 다른 장소에 홀로 남아있었다면 철거를 운운할 여지도 없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조선의 문화를 제대로 재건하기 위해서는 경복궁과 광화문이 복원되어야 한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불법 무허가 건물을 철거해야만 한다. 중앙청 건물은 조선 민족이 거기 있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액자가 아깝다고 일장기가 들어가 있는 액자를 방안에 걸어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혹자는 말했다. ‘중앙청 철거는 민족정기 회복이 아니라 역사 파괴였다. 기분 나쁘다고, 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을 부셨다.’ 그는 중앙청 철거를 말하면서 목이 메었다. 한 동안 말을 못했다.

 

경복궁과 광화문을 파괴한 야만의 역사는 기억하지 못하고 아픔의 역사도 역사라며 그 자리에 들어선 불법 무허가 건물을 지키겠다고 울먹이고 있는 것인가. 한편 경복궁과 광화문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당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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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하기 전, 중앙청 건물-앞에 광화문은 콘크리트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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