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문학가 산책]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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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영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29 08:56 조회8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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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인 (시인, 캐나다 한인문학가협회 회원)
코끝에 진한 향이 먹을 쥔 손을 놓게 한다
오랜 시간 힘을 빼고 가볍게 슬슬 갈아 놓은 먹물
벼루에 담겨 짙은 먹빛 광택을 낸다
맑은소리 나는 돌 정과 망치로 쳐내며
사포 같은 모래로 갈아 물 고이는 연지 만들고
송연묵 갈면서 그 촉감 묵향에 젖는다
닥나무껍질 찌고 벗겨서 삶고 두드리고 물에 풀어
노란 접시꽃 손가락 사이사이로 물고기 떼처럼
한올 한올 살아 움직이며 발 위에서 첫물 뜨고
좌우로 떠 살을 채우면 조금 더 질긴 한지가
강산이 네 번 가고도 오래되어 꾸깃해진
색이 바랜 화선지를 버릴 수가 없어 고맙게 쓴다
지금 종이와는 다른 얇고 번지지만 맛이 있다
하얀 화선지 길이로 펴고 문진으로 한 곳 눌러
붓끝에 농묵 기운 가득 붓대를 쥐고 한 획 긋다가
가늘게 흘려 연결해 살며시 길게 천천히 놓아준다
서체에 따라 숨결에 따라 마무리도 다른 빛을 낸다
꽃봉오리 맺으랴 세찬 바람 견디랴
낮추고 낮추며 그 생명 이어갈 때
연기 속에 그을음은 검은색 회색 청색을 띠며
매끄럽게 발묵 되고 여백까지 묵향 스며 발화된다
칡 줄기로 만든 갈필 긴 것 짧은 털 섞음질
부드러운 털의 붓 뻣뻣하지만 강하며 탄력 있는
네발 달린 그들을 감싸줬던 교감하며 감촉이 손끝에
날카롭게 이어지는 획 한 생각 놓치면 어디로
다시 들어 곧게 가다가 휘어지고 작게 멈추다
회오리치듯 급해진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붓끝을 모아 숨 고르고 지필묵연이 만들어지듯
흙 속에서 숨죽이며 견디고 있다 이제 나오는 봄
흰 화선지에 거침없이 스미듯 봄의 넓은 길 앞에
진달래 해당화 영산홍 목련 복수초 들꽃 야생화
잔잔한 물망초 패랭이 찔레꽃 이름이 먼저인 개나리
붓에 머금은 먹물이 화선지에 내려 한 획을 그을 때
숨 쉬는 종이에 퍼져 뜻을 알린다
멈춤 없이 순간을 흐르는 피기도 하고 이미 져버린
이제 막 지려 하다가 기대하지 않은 새순 빼꼼히
갈 줄 알면서도 깊은 향 뿌리며 온 새봄이
잠시라도 우리의 눈을 흐드러지게 만들 테니까.
소나무 향 먹물이 화선지 위에서 만개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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