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96년 묵은 '청년기' 고택 … 6·25때 3사단장실로 써 총탄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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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12 15:24 조회1,3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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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봉화 춘양 강춘기·손희정 부부의 성암재
사랑주인 이름은 강춘기(1950년생), 안주인 이름은 손희정(52년생). 둘은 평생 도시에서 살림을 꾸리다 기업대표였던 남편의 은퇴 후 조부가 살던 옛집으로 돌아왔다. 2012년 가을, 혼인한 지 40년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할아버지의 호인 성암(醒巖)을 당호로 삼아 ‘성암재’란 현판을 사랑채 처마아래 걸었다. 사람의 역사는 살림집에 쌓인다. 짧은 시간에 거대도시가 생겨나고 수백만호의 새집을 한꺼번에 짓는 ‘토목’으로 나라살림이 가동되는 동안, 개인의 역사는 여지없이 납작해지고 얄팍해져 버렸다. 이럴 때 돌아갈 옛집이 있다는 건 드문 행운에 속한다. 선대가 축적한 역사에다 개인의 역사를 잇댈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게 주는 혜택은 겉으로 셈할 수 있는 그 이상이다.
‘이야기가 있는 집’이 예찬하고 싶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고결한 정신은 서책 속에 있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 있다.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바로 집이고 구체적인 집이 있어야 추상적인 정신이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성암재는 1918년, 춘기씨의 증조부인 의재 강필 선생이 셋째 아들 성암 강승원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바로 곁에 있는 만산고택은 봉화의 대표적 한옥으로 집주인 강백기씨는 조부가 형제분이니 춘기씨와는 6촌간이다.
“개화하신 조부는 한때 이 집을 뜯어 서울로 옮길까하는 궁리가 많으셨대요. 아버지도 세무공무원으로 서울에 계셨으니 돌아올 기약도 없고. 우리들에게 이 집은 한때 ‘계륵’이었어요. 내려올 수도 없고 버려둘 수도 없이 관리에 돈만 자꾸 들어가는!”
“80년대 프랑스 고성에서 숙박을 했는데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우리도 언젠가 비워둔 춘양의 집을 이렇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지요. 그러려면 조금씩 준비를 해두자 싶어 저는 차 공부를 시작했고 남편에게는 바리스타 공부를 권유했지요.” 아내 희정씨의 말이다. 그래서 둘은 지금 베테랑 차인(茶人)이고 바리스타를 심사하는 특급 바리스타다. 성암재에 머무는 손님들은 최고의 연화차와 커피맛을 경험할 수 있다. 성암재 너른 뜰엔 흰 테이블보가 바람에 펄럭이는데 그 위에서 천천히 커피를 내리는 남편과 사랑대청 맑은 마루에 흰 광목보를 깔고 함지박만한 찻사발에 천천히 백련을 우려내는 아내의 모습은 인생의 또 다른 장엄이다. 성암재에 한번 다녀간 이들은 블로그에 무성한 성암재 예찬을 올린다. 그 바람에 찾아오는 사람을 실망시킬 수 없어 차 대접을 멈출 수가 없다.
성암재는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우리 근대사가 불운하니 집에도 깃든 곡절이 많을 수밖에!
일제 강점기에 의재선생은 거처하는 만산고택 아닌 이 집에서 상해 임정 요인들을 만났다. 일경이 눈치채지 않게 군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어려운 사람들에겐 늘 곳간을 열어뒀다. 덕분에 빨치산이 출몰하던 6·25 동란의 와중에서도 만산고택엔 몸을 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쟁 때 우리 사랑채를 국군3사단장실로 썼어요. 어린 희완 삼촌이 사단장 당번병과 친구가 되어 놀다가 당번병의 실수로 가슴에 총상을 입었어요. 이게 그 총알 자국이에요.”
기둥에 움푹 팬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아버지가 당시 명약으로 소문난 페니실린을 가져 오신 덕분에 상처가 한 달 만에 아물었대요” 춘기씨의 고모는 경주 최부자집 맏며느리가 되셨다. 고모와 대고모들이 다들 경북 일대 뜨르르한 집안의 종부로 출가했으니 도산 번남댁, 오미동 유연당이 다 인척으로 얽혀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꽃을 좋아하신 조부는 따님의 혼례식 날 만산고택과 성암재를 온통 국화로 가득 채우셨지요.”
이 부부의 혼인 이야기도 특별하다.
“처의 외조부와 제 조부가 친구셨어요. 두 분이 만나 사돈 하자고 결의하셨고 세 번째 만나는 날 결정을 내리라 하시대요”
희정씨가 봉화 강씨 가문에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숫감 목록에는 특별한 게 있었다. 몇 그루의 향나무였다. 오백년 묵은 향나무로 소문난 서백당의 딸이니 새 사돈께 그것을 선물하고 싶으셨던 거다. 좁은 지면에 이 집의 구구절절 역사를 어찌 다 말하랴. 올해 아흔이신 춘기씨의 부친 강희탁 선생이 자신의 일생을 가사체로 회고한 책을 읽으며 나는 새삼 삶이 찬란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십만리 이국땅 ‘이바단’에서/서로 만나 반기니 마음이 흐뭇/애비가 출근길에 원석이 태워/영국인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 하학길은 어미가 데리고 오고/ 오후엔 수영장서 즐겁게 노니/ 지연남매 수영솜씨 정말 볼만해’ 아들 가족을 만나러 아프리카에 들렀던 기록에 나는 실없이도 무릎장단을 친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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