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 청와대 조리장 7년…한상훈 셰프의 양식당 ‘심빠띠아’ ‘R.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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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4-03 13:22 조회3,0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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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관저서 최순실씨 김밥 싸줘" 폭로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입증할 물증으로 ‘태블릿PC’의 존재를 보도한 이래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기까지 역사는 급류와 격랑을 헤쳐가야 했다. 최순실씨가 박근혜정부의 국정에 얼마나 개입하고 뒤흔들었는지 확증이 없어 설왕설래할 때 그가 나섰다. 2016년 12월 7일 『여성동아』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증언했다.
“임기 초부터 이영선 전 청와대 제2부속실 행정관이 거의 일요일마다 최씨를 픽업해 프리 패스로 청와대에 들어왔다. ‘문고리 3인방’은 관저에서 그를 기다렸다. 조리장도 3명 대기했다. 관저 주방에서 화장실 가는 길에 그와 두 번 마주쳤다. 늘 일본식 전골 요리 ‘스키야키’를 먹었다. 3인방과 회의할 때는 출출하다며 김밥을 달라고 했다. 집에 갈 때 김밥을 싸 달라고 해 포일에 싸서 줬다.”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폭로에 역사의 물굽이는 크게 요동쳤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 가는 물줄기는 불가항력의 노도(怒濤)가 되어 길을 재촉했다. 민심은 기어이 승리했지만, 힘을 보탰던 그에게는 뒤치다꺼리할 일만 산더미로 남았다.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요리에 몰입하다 보니 그는 다시 평범한 요리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2009년 5월부터 2016년 6월까지 7년 2개월 동안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실 조리장’ 자격으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식사(양식) 준비를 담당했던 한상훈(46) 셰프다. 그의 집안은 대통령들과 인연이 기묘하다.
그가 양양고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한계령 너머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서 ‘청기와집’이라는 한식당을 했다. 옥호 때문일까, 어느 날 건장한 젊은 남자들이 찾아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식당 문 닫고 자신들이 원하는 밥을 해달라고 했다. 1988년 11월, 전두환씨가 백담사에 ‘유배’ 왔을 때다. 3개월 가까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백담사로 가는 밥을 준비했다.
마침 고등학교가 방학을 해 한상훈 학생은 양양읍내 집을 떠나 어머니 식당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20년이 흐른 뒤 한 셰프가 청와대 주방의 양식 조리장으로 가니 그때 얼굴을 알던 경호관이 있었다. 어머니의 음식점에서 밥해 나르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대통령 지낸 사람 밥해줬다”며 그 일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 아들이 2대에 걸쳐 대통령 식사를 맡아서 하자 그 자랑을 더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백담사 온 전두환씨 식사 담당
한 셰프를 만난 날(23일) 0시 2분에 이명박 전 대통령(MB)에 대한 구속영장이 집행됐다. 그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모시던 분이 둘 다 그렇게 돼 인간적으로는 마음이 아프다. MB는 출∙퇴근 정확하고 일 중독이었다. 그래서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었다. 일 의욕을 좋게 썼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우리 가족이 지은 밥 먹은 전직 대통령은 다 감방에 갔다. 인연 참 묘하다”며 눈길을 먼 하늘로 돌렸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2곳 총주방장 맡아
일반 레스토랑 ‘심빠띠아(48석)’와 호텔 레스토랑 R.ENA(90석)의 음식값이 같으면 호텔로는 값이 싸다. 총주방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그는 “호텔 레스토랑 주방을 맡으면서 음식에 관해서는 가격정책 전권을 요구했다. 서울의 호텔 양식당 가운데 흑자가 나는 곳은 없다. 호텔 식당은 얼마 남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들락거리느냐가 관건이다. 사람이 많이 오는 명소를 만드는 게 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값을 싸게 했다. 현재 점심은 이틀 전에 예약이 거의 끝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23일(금) 점심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니 좌석 회전율은 130%쯤이었다.
대표 음식이 뭔지 물었더니 레스토랑 메뉴 가운데 3가지를 추천했다. ①안티파스토(파스타를 먹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먹는 간단하고 차가운 전채요리). ②한 셰프가 개발한 홍어구이. ③한 셰프가 직접 재배한 바질 페이스트가 듬뿍 들어간 해산물 바질 리소토.
4가지 요리와 루콜라·아스파라거스 전채
안티파스토(2만1000원)는 양이 많았다. 그는 “2인용 중간 크기”라며 “음식을 먹으면 ‘아, 잘 먹었다. 배부르다’ 그런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양을 많이 한다”고 했다. 전채인데도 커다란 접시에 재료와 조리법이 다른 4가지 음식을 둘러놓았다. 내용을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다 손색없는 요리다.
①얇게 저민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번갈아 겹겹이 놓고 바질 페이스트를 뿌린 카프레제. 바질 페이스트에는 파마산치츠∙잣∙마늘도 갈아 넣었다. ②쥬키니호박∙파프리카∙가지∙버섯∙양파를 얇게 저며 굽고 발사믹 소스에 이틀 절여 마늘∙올리브오일∙머스터드∙꿀로 만든 드레싱에 버무린 채소구이. 여기도 바질 페이스트로 향을 더했다. ③파르마 프로슈토를 얹은 멜론 ④레몬 드레싱에 절인 오징어∙관자∙새우를 채소에 올린 해산물 샐러드.
접시 가운데는 루콜라 잎을 수북이 담고 종이처럼 저민 치즈와 어린 채소로 장식한 다음 한쪽에 구운 아스파라거스 3개를 올리고 발사믹 소스를 뿌렸다. 맛과 향의 다채로운 변화와 질감(texture)의 강약이 리드미컬했다.
홍어구이(2만9000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요리라고 소개했다. 그가 좋아하는 안초비 오일을 활용해 시험 삼아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먹어보고 좋다며 메뉴에 넣으라고 해서 만든 창작요리다. 그는 한국인이 즐기는 재료에 서양 조리법과 소스를 적용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의 하나가 홍어구이다. 이 음식에 들어가는 안초비 오일도 그런 생각으로 만든 소스다. 양식 조리는 소금만으로 간을 하는데 한국의 젓갈과 맛이 비슷한 안초비를 올리브오일에 섞어 소스를 만드니 감칠맛이 생기고 풍미가 깊어졌다.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도 활용했다고 한다.
이름은 홍어구이지만 원가 부담 때문에 국산 홍어를 쓰지는 못하고 가오리를 썼다. 쥘부채 절반 크기로 자른 가오리 날개 살을 커민∙마늘∙올리브오일로 만든 드레싱을 발라 재웠다가 오븐에 굽고 안초비 오일, 올리브, 커민, 케이퍼(꽃봉오리 피클), 방울토마토, 양건(陽乾) 토마토, 마늘, 고추로 만든 소스를 뿌렸다.
홍어구이를 자주 찾는 손님들은 먹다가 “소주는 없냐”고 묻는다. 그래서 R.ENA 메뉴에는 넣는 모험을 했다(6000원). 하지만 “격 떨어진다”는 이유로 반응이 좋지 않아 5월 개편 때 빼기로 했다. 도수 높은 술을 즐기는 나는 없애지는 말고 프리미엄 증류주로 바꿀 것을 권했다. 살과 양념은 맛이 독특하고 좋았지만, 가닥이 긴 물렁뼈는 씹기에 억센 편이었고 발라내는 데 공이 너무 들었다.
홍합∙관자∙새우∙오징어와 작은 전복이 들어간 해산물 바질 크림 리소토(2만원)는 되직한 녹두죽처럼 보였다. 바질 페이스트가 많이 들어가서 그렇다. 한 셰프는 “바질이 없으면 음식이 안 된다. 워낙 좋아한다. 향이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바질 중독’인 그는 레스토랑 건물 옥상에 바질을 직접 재배한다. 곧 씨를 뿌릴 예정이다. 4월 말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잎을 계속 수확해 매일 쓰고, 남는 것은 저장해뒀다가 추운 계절에 사용한다. 그는 “겨울에는 비싸기도 하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바질은 맛이 없어서 직접 재배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나 피자가 아니라 리소토를 대표 음식으로 꼽는 이유를 묻자 “바질 향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싫어하는 음식도 자꾸 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요리사”라는 말을 덧붙였다.
R.ENA 레스토랑은 5월 18일부터 지중해 음식점(Mediterranean Cuisine)으로 개편할 예정이다. 우연이지만 이날은 그가 2009년 청와대로 처음 출근한 날이다. 점심에는 기존에 하던 대로 파스타∙피자를 주로 하되 저녁에는 아랍∙그리스∙스페인까지 아우르는 지중해 음식을 낼 예정이다.
음식에서 간을 가장 중요시…살짝 세게 해
지중해 음식은 20년 전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근무할 때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손님들이 익숙하지 않은 요리는 주문하지 않는 걸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아랍의 ‘메제(여러 음식을 반찬처럼 조금씩 담아내는 방식)’나 스페인의 ‘타파스’ 스타일을 응용해 전채 요리를 구성하면 술안주로도 먹을 수 있으니까 요즘 손님들 흐름에도 맞을 것 같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손님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중간보다 약간 세게 간을 한다. 사람들 입맛이 점점 외식에 길들어 있어 간이 약하면 맛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원가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짜장면은 4000~5000원인데 파스타는 4~5배 비싼 1만5000~2만원을 받는 이유도 간하고 관계가 있다고 본다. 짜장면은 100~200인분의 소스를 한 번에 볶아 놓고 면 삶아 퍼 얹어주기만 하면 되지만 파스타는 한 그릇씩 볶을 때마다 간을 따로 맞춰야 하니까 그만큼 인력이 더 들어간다는 얘기다.
고교 때부터 음악…대학에서는 성악 전공
입문 2개월 만에 강원도 내 고교생 콩쿠르에 나갔다. 노래 2곡을 가사만 겨우 외워 나갔는데 여학생이 1등을 했고, 자신은 2등을 했다. 가정 사정이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다닐 형편은 안 돼 독학하다시피 성악 공부를 했다. 의욕과 열정만으로, 하고 싶어서 음대에 지망해 턱걸이로 합격했다. 좋아하고 열심히 하니 졸업은 수석으로 했다.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성악으로는 먹고 살길이 막연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인생의 진로를 과감하게 요리사로 바꿨다. 대학에 다니면서 강릉시립합창단원이 되기까지는 무난히 음악가의 길을 갔다. 서울에 진출하려고 몇 군데 오디션을 봤다. 다른 사람들 노래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요즘 말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멧돼지 발골 요리사에 매료…호텔학교로
어디 가면 이런 걸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요리는 힘들다. 하지 말아라”고 말렸다. 그래도 매달렸다. 그가 나온 학교를 알려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경주호텔학교였다. 바로 입학절차를 알아보고 경주로 갔다. 기숙학교 1년 과정을 수료했다. 어머니가 한식당을 운영한 환경의 영향도 작용했다. 지금은 대학 호텔조리학과가 많지만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그때는 한두 곳뿐이어서 경주호텔학교를 나오면 특급호텔 직행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졸업하고 처음 간 곳은 조선호텔 베이커리 사업부였다. 제과 제빵을 해보니 적성에 맞지 않았다. 조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제품을 생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화를 좋아하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그에게 정해진 양에 따라, 정해진 규칙대로 반죽∙숙성하여 굽는 일의 반복은 지루했다. 1년여 일하다가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옮겼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변화를 즐겼다. 10년 7개월 근무한 호텔에서 청와대로 간 것이나, 7년 2개월 근무한 청와대를 나온 것은 요리의 길 안에서 변화와 새로움을 찾아가는 진로 수정이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청와대 조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JTBC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제작회사에서 “스타로 키워주겠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2016년 6월 주택까지 제공하는 좋은 조건으로, 청와대를 나와 소속을 바꿨다.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기로 해 두 달이나 연습했다. 8월 말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 2주일 방송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출연 섭외가 왔다. 소속사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촛불시위가 시작되고 국정농단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연락은 끊어졌다.
"촛불집회 보니 침묵한 내가 부끄러워져"
인터뷰 이후 1년 5개월이 지났고, 그 사이 세상이 바뀌었지만 그는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고향에 사는 어머니는 외출도 조심스러운 지경이다. 지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용히 있지 왜 떠들었냐”는 여론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때 청와대의 내밀한 일들을 세상에 알린 이유를 “광화문 촛불집회를 우연히 보게 됐다. 추운 날 멀리서 촛불을 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니 입을 다물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관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다들 최순실씨의 존재를 알았다. 하지만 현직에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말을 못 하는 것뿐이다. 청와대를 그만둔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여성동아 2017년 1월호)고 밝힌 바 있다.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까 스타 셰프의 꿈은 일단 미뤄두고 지인이 추천하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됐다. 그곳이 2016년 10월부터 일하고 있는 ‘심빠띠아’다. 월급쟁이 요리사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스펙으로 보면 대한민국 상위 5% 셰프다. 특급호텔에서 12년 일했고 청와대 조리장으로 7년 2개월 근무했으며, 박사 학위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들은 레스토랑 주인인 줄 알지만 월급 받는 총주방장이다.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이름 없던 레스토랑을 맡아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전력 질주했다. 사장이 쉬라고 권해도 쉬지 않고 연중무휴로 일했다. 잘 된다고 소문이 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ENA 스위트 호텔에서도 레스토랑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호텔보다 앞서 지난 1월 2일 R.ENA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그는 “한쪽이라도 잘 안 되면 내 앞길이 막힌다. 내가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을 오가며 온 힘을 쏟고 있다. 근무 위치는 점심∙저녁으로 나눠 예약 손님이 더 많은 쪽으로 움직인다. 새로운 업장을 더 맡지는 않겠다” 밝혔다.
면접∙시연∙신원조회까지 5개월 가까이 걸렸다. 조리 시연 때는 농어 요리와 등심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한 양식 코스를 선보였다. 며칠을 고민해 메뉴를 짜고, 당일 오전 8시부터 재료를 준비해 혼자 면접관 15명이 먹을 코스 요리를 점심때 차려냈다.
월급 적던 청와대…식재료·김치 많이 배워
청와대 있는 동안 월급은 호텔보다 훨씬 적었고 갑갑한 측면도 있었지만 재료에 대해 많이 배웠다. 특히 제철에 나는 나물과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들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실험도 했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산지 여러 곳을 수소문하고, 양식 샐러드에 울릉도 전호나물도 넣어봤다. 부지깽이나 명이나물은 해보니 모양이 살아나지 않는 것도 알았다.
한식 재료에 양식 소스와 조리법 적용을 잘못하면 아주 싸구려 음식이 되는 걸 체험했다. 아무 데나 응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됐고,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총각무로 담근 피클은 성공했지만 치킨 무 깍두기는 망했다고 예를 들었다. 치킨 무에 토마토소스를 얹으면 보기엔 깍두기와 흡사한데 피클 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손을 안 댔다. “어설픈 퓨전은 망하는 길임을 알았다”고 실패로부터 배운 경험을 털어놨다.
MB 부부, 일관된 식사…셰프 기량은 정체
MB 재임 때 청와대 주방에 근무한 3년 10개월 동안 한 셰프는 “개인적으로는 요리 실력이 정체했고 많이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대통령 부부 식생활이 너무 일관성 있어서 여러 가지 음식을 해볼 기회가 없었다. MB는 수프는 프랑스식 양파 수프만 먹고, 아침 식사는 날마다 쑥떡∙꿀∙은행에 수프 또는 주스였다. 부인은 샐러드는 시저샐러드 아니면 손을 안 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양하게, 뭐든지 잘 먹었다. 먹지 않은 반찬도 젓가락을 댄 듯한 흔적을 만들어 상을 물렸다. 대통령의 식성과 기호를 파악하기 위해 들어간 음식 무게와 남긴 양을 그릇마다 늘 재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음식이 맛있으면 꼭 비서를 시켜 “잘 먹었다”는 인사를 전하도록 했다. 대신 박 전 대통령 재임 때는 청와대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퇴보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음식점, 사람 구하기가 가장 어려워"
“1990년대까지 호텔 주방은 경희대와 경주호텔학교 쌍두체제였다. 그때는 학교에서 실습 중심으로 워낙 스파르타식 교육을 해서 과정을 마치면 바로 특급호텔로 갔다. IMF 외환위기 때 경주호텔학교가 없어지면서 요리사 양성 분야가 침체되나 싶었는데 드라마 ‘대장금’(2003~2004년)이 대박 나면서 요리사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전국 대학에 조리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요즘은 공급과잉 상태다.
대학에서 학과 이름을 호텔조리학과라고 하니까 학생들은 졸업하면 호텔에 가겠지 생각한다. 하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다. 아르바이트 5~6년 거쳐야 받아줄까 말까다. 조리는 대학에서 4년씩 배울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4년 배우는 거 현업에서 3~4개월 뛰면 다 배운다. 어느 고등학교에 강연하러 가서 이런 얘기를 했다가 교장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요리사를 생업이라고 생각하면 하기 힘들다. 열정과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이 일로 인생의 승부를 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재미도 있고 성취도 빠르다. 열정과 간절함으로 요리하려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저 돈벌이 노동으로, 생활의 수단으로 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 외식업체 주방에 공장에서 만든 완제품 소스들이 많이 들어오는 게 그걸 반증한다. 그런 소스로 음식을 만들면 요리는 퇴보한다.
요즘 음식점 경영하는 데 가장 힘든 게 사람이다. 손발 맞춰 일할 사람 구하기가 음식 하기보다 훨씬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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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중앙일보] [이택희의 맛따라기] 청와대 조리장 7년…한상훈 셰프의 양식당 ‘심빠띠아’ ‘R.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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