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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산책] 붓글씨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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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6-18 09:31 조회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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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숙인(수필가.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붓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 전부터 따스한 봄볕 아래 새로운 꽃망울이 터지는 이 즈음에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내내 하였다. 무엇을 해야 모두가 신나고 즐거울 수 있을까 며칠 동안 고민을 하다 보니 절로 머릿속에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의 한글학교 제자들에게 이제 껏 해보지 않았던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여도 언젠가는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아무리 한국어가 좋아서 매 주 마다 배우러 와도 가끔은 충분히 지겹고 무료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각 자가 붓글씨로 써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학생들 모두가 시험이다 숙제다 클럽 활동에 과외 활동까지 틀림없이 지쳐있을 터인데 주말에 놀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러 오는 그 정성을 생각하면 나 또한 특별한 정성으로 학생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벼루와 먹을 준비하고 내가 가진 세 자루의 붓과 한국에서 공수해온 둘둘 말아진 한지를 통째로 꺼내 놓았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학생들은 붓글씨를 배울거라는 내 말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나이가 많거나 적음을 떠나 아이들은 붓글씨를 배우는 내내 너무나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하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벼루와 먹을 보며 그것들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슬쩍이 만져보며 매끄러운 표면을 쓰다듬기도 하였다. 직접 먹을 갈아 만들어낸 먹물이 잉크로 쓰여질 거라는 말에 믿을 수 없는 표정들을 하였다. 아이들은 새로운 작업에 임하며 붓을 든 손을 덜덜 떨며 수 없이 긴장을 하고 그러면서도 참으로 행복하게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 처음 갈아보는 먹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러 쥐었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손으로 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벼루를 받쳐가며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다가 다시 앞 뒤로 움직여 보며 열심히 먹을 갈았다. 붓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는 붓에 먹물을 골고루 묻혀야 하며 무엇보다도 글자를 쓰고 나서는 붓끝을 다시 뾰족하게 만들어주어야 다음에 쓰여질   글자가 잘 써진다는 말에 붓을 벼루에 눕혀 위, 아래로 벼루에 치대며 끝을 뾰족하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개의 학생들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서도 쉽사리 쓰지 못하고 먹물 묻힌 붓을 들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한지에 쓰려다 말고 갑자기 숨을 크게 내쉬고는 자신없어 하다가 들고 있던 붓을 도로 내려 놓았다. 긴장한 나머지 땀나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다 다시 붓을 힘겹게 들고 일순간 들이마신 호흡을 정지한 채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드디어 한지에 첫 먹물을 듬뿍 묻히며 쓰기를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나타내는 갖가지 반응이 재미있어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들키지않게 옆에서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지켜보며 지도를 해주었다. 아이들은 진중하면서도 매우 절제된 모습으로 붓을 들고  그 동안 배운 한국어를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전교생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또 썼다. 평소에 좋아하는 글귀나 문장 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이든 써도 된다고 하였고 직접 창작을 해도 좋다고 조언해 주었다. 11학년인 알렉스는 한국인 친구의 이름과 내가 지어준 한국 이름인 지우를 나란히 썼다. 대학 2년생인 캐롤라인은 본인의 영어 이름과 직접 지은 한국 이름인 나리를 따로 썼다. 또한 평소 좋아하던 시문을 길게 한국어로 번역하여 붓글씨로 연습하였다. 나의 한국어 학교의 전교생은 모두가 여덟명이다. 이 가운데 토종 한국인은 딸인 레이첼뿐이다. 대학생이 다섯명, 고교생이 하나, 초등생이 하나, 유아가 한 명이다. 재학생이 셋, 입학 예정자가 하나, 휴학생이 둘이었다. 또 특별생이 둘 있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이따금 한국어를 듣는 학생들이다. 두 살 바기 입학 예정자를 빼고 휴학생들까지 붓글씨로 쓴 이름표에 학생들 각 자의 사진을 붙여 개인별 사진첩이 완성되면 한국어 교실 한 쪽 벽면에 붙여놓을 생각이었다. 교장이자 교사이면서 서무과 직원이자 학교 관리인인 나의 이름표도 만들었다. 즐거운 붓글씨 시간으로 모두들 행복해하니 나 또한 열악한 가운데 운영해야 하는 한국어 학교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밴쿠버 총영사관에서는 한국인 교포가 열 명 이상 되어야 한국어 교재 지원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9월에 입학할 유아까지 모두 합쳐도 오롯이 셋뿐이었다. 붓글씨로 인하여 창고에 박혀있던 문방사우가 다시 꺼내어져 내 앞에 모습을 보이니 참으로 기뻤다. 오래 전, 고교 시절에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서각 동아리에서 3년 내내 혼을 바쳐 작업을 하였던 적이 있다. 우리 전통 예술인 서각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각(書刻)이란 그림과 글씨 등을 나무에 새기는 예술의 한 갈래로 서각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해 글씨나 그림의 특징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는 과정은 수도자의 수련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잡념없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숭고한 예술 작업이다. 보통 서각에 이용되는 글이나 그림은 조선 전, 후기의 대표적인 명필 문인들의 글이나 그림이 이용되어진다. 그들의 글이나 그림을 복제하여 잘 건조된 나무에 풀로 단단히 붙이고 건조시킨 뒤 서각칼과 망치로 작업에 임하게 된다. 옛 문인들의 서체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나는 붓글씨로 내 나름의 글씨체를 발굴하고 창작한 나의 글들을 직접 서각까지 하고 싶어 문방사우를 예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터였다. 어찌보면 나의 보물을 아낌없이 풀어 나의 학생들에게 내어준 셈이었다. 나의 보물을 내가 아끼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어쓰니 세상에 이처럼 뜻깊은 일은 없지 싶었다. 즐거웠던 붓글씨 수업이 끝나고 문방사우를 정리하며 다시 서각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에 마음이 설렌  하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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