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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지삿게 벼랑의 바닷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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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슬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3-28 16:47 조회2,1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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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e03af5af4fba926e514f85b0b3baba8_1553816813_3953.jpg이슬샘(露井) / 시조시인,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창문에 비친 백설표 눈의 윤곽이나 육각수 물과 수정 돌처럼 자연의 창조물들이 제각

 

기 육각 모서리를 형성하는 건 참 신기하다.

 

 주상절리 이른바 제주 중문에 위치한 지삿게 바위 벼랑은 일찍이 한라산이 분출해낸

 

용암이 이 곳 바다로 흘러들면서 식어서 육각 바위기둥 단애를 만드는가하면 사방 흩

 

어진 암반들도 육면체의 벌집형상이나 거북등 문양으로 금이 갈라져 있다. 제주 섬 한

 

라산은 화산폭발로 융기한 열정을 뿜어 남쪽 바다에 이르러서야 무수한 육각 말뚝들을

 

박고 외곽 영역의 울타리를 삼았던 건 아닐까.

 

 

 

 물로 존재하는 바다는 뭍과 경계를 다툰 이래 땅 끝에서 흙과 바위를 깎아 절경을 만

 

들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경관의 휴식처를 제공한다. 바닷가로 내닫기는 좀 늦은 시간

 

이었지만 종일 컴퓨터 바둑에 매달렸던 피로를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남은 해를 쫓아

 

해안도로를 타고 단숨에 중문단지에 다다랐다.

 

 

 

 바다를 내려다보기 좋은 주상절리 벼랑길을 안내된 푯말을 따라 제법 내려가는데 중

 

간쯤 돌출된 바위 위에서 웬 여성의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인 게 눈에 띈다. '어

 

어쩐 일로 이 높은 벼랑에다...' 내심 자아지는 궁금증의 탄식과 함께 좀 더 내려가자

 

아니나 다를까 바위로 둘러싸인 바닷물에 젊은 여인이 두 팔을 펼쳐든 채 둥 둥 떠있다. 

 

 마침 그곳은 바위 성벽이 둥글게 파도를 막아주고 있어서 거친 바람만 없다면 파도에

 

떠밀려갈 형국은 아니었다. 가끔 세찬 파도가 바위 영역을 타넘을 때마다 수직으로 선

 

여인의 몸은 수면 위로 솟구쳤다 내려앉았다 할 뿐 여인은 고개를 쳐들고 애써 발돋움

 

하고 있는 자세이다. 좀 더 주의 깊이 관찰했더라면 겨우 머리만 물 밖으로 치켜든 여

 

인이 무언가 호소하는 느낌이었을 거다.

 

 

 

 순간적으로 몸을 밧줄에 묶어서라도 입수할 요량으로 뒤에 오는 식솔을 다급히 불러

 

놨더니 녀석은 못 볼 걸 보라고 한 듯이 손사래를 치며 오던 길을 되짚어 가버린다.

 

 이를 어쩌나 싶어 종종걸음 치며 내려가니 다행히도 한 낚시차림의 태공이 벌써 여

 

인에게 헤엄쳐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여인이 무슨 얘길 한다고 느낀 것도 이

 

남성과 도움을 받을 의사타진이 아니었든가 싶다. 진정한 용기와 수영실력을 가진 남

 

성은 자신의 체험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 듯 조심스럽게 여인을 물가 갯

 

바위 위로 밀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실제 뭍과는 사뭇 먼 그 갯바위로 접근이 용이해

 

보이기도 했으나 그는 지금껏 낚아올린 어떤 월척보다 훨씬 의미있는 전율을 느끼며

 

신중하게 손길을 뻗었으리라. 이 장면을 지켜본 몇 안되는 주변 사람들마저 마치 자기

 

들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처럼 안도의 탄성을 자아내며 대견스러워했다.

 

 

 

 무슨 연유였든 죽음에 직면했다가 가까스로 생명을 돌려받게 된 여인은 아직 뭍엔 오

 

르지 못하고 추운 갯바위에서 동그랗게 작은 어께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먼 수평에 걸려있던 해도 오늘 하루 자신의 충실한 소명을 다했음을 알리며 수면 아

 

래로 잠길 때 지레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파도가 날뛰는 바다는 붉게 물들고 있다. 흩

 

어진 주변 바위 중에서 그나마 몇사람 정도 앉을 수 있었던 공간에서 지친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향해 주저앉았고 주변은 그저 아무 말이 필요치 않은 듯했다.

 

 

 

 남자가 자신의 젖은 재킷을 벗어 물기를 짜내고는 여인에게 걸쳐주는 모습이 어둠 속

 

실루엣 판화처럼 각인될 때는 마치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부부의 저녁 기도가 연상되

 

지만 포옹도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생면부지의 두 남녀에게는 안타까움만 감지된다.

 

 이제 황홀했던 지삿게 앞바다에도 별들이 내려와 산책하겠지만 이따금 여인의 울음소

 

리가 섞여오는 여느 신전 기둥 같은 지삿게 바위의 파도와 바람은 함께 숨을 죽이며 무

 

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사람들의 평온한 의지를 감싸주고 있었다.    

 

 

 

 이윽고 뒤늦게 연락을 받은 소방서 안전요원들이 전등과 구명대 밧줄 자일 따위의 채

 

비를 갖추어 왔고 잠시 의논을 마친 그들은 능숙하게 두 남녀를 밧줄에 매달아 뭍으로

 

옮겨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 중에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는데 머뭇거리며...'

 

란 노랫말이 있듯 여인이 생사기로에서 택한 참 모습은 정말 존귀함 자체가 아닐까.

 

 

 

 여인이 소방대원에게 업혀 올라올 즈음 몇 몇 구경꾼에 불과했던 우리들은 갑자기 잊

 

고 있었던 할일이 생각나기라도 하 듯 서둘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마치 이 일을 기

 

억하려는 취재원이 없음이 다행스럽듯이 무리 중 아무도 그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마

 

주대하기엔 벅찬 상황이기에 피해주는 배려로 여겨진다. 알려서 좋은 일의 이름과 동

 

기와 뜻이 있는가하면 덮어주어서 외려 편한 속사정이나 인맥관계도 있으리라.

 

 밭농사로 캐낸 여유있는 감자 수확이 주인의 아량으로 필요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밭

 

둑에 남겨지듯 아름다운 미덕과 따뜻한 마음들의 크고 작은 제주 오름들도 이미 저물

 

었고 모든 아픔을 안은 먼 바다는 숫제 무대조명을 끈 듯 까무룩 하다. 

 

 

 

 파도가 연일 들이치며 우리들을 넘보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인에 대한 소문

 

은 단 한 줄도 기사거리가 되지 않았고 바다는 갯바위의 검게 탄 얼굴을 아무 흔적 남

 

김없이 얼룩진 소금 눈물로 닦어내며 달래주는 것 같았다. 

 

 이따금 바다가 더 큰 파도를 만들어서 지삿게 바위 절벽까지 침범할 때도 바람은 우리

 

들의 겁난 가슴에 대고 '그만하면 됐지, 다신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하면서 아팠던 금

 

이 다 아물도록 가만 가만 어루만져 줄 뿐이다.

 

 밀려오는 파도가 보이는 지삿게 벼랑에서는 오늘처럼 먼 훗날에도 바다가 우리들에게

 

'괜찮아 다 괜찮아 질 거야...'하고 줄곧 부드러운 긍정만으로 바람을 손짓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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