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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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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종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7-31 11:36 조회1,7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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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8db4d19d3a8b5ceb6f6999c4b09b6_1564598166_4187.jpg 전종하 

(사)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나는 지금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기까지 총 세 차례의 면접시험을 보았다. 마지막 면접은 해당 부서의 수장인 수석 부사장이었다. 그는 내게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한 분야에서 25년을 일하면서 조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의 성공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조각 모음’ 이라고 했다.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성공과 실패의 조각들을 잘 모아서 훌륭한 교훈으로 삼았다고 했다. 매 순간의 기록을 얼마나 잘 남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조각들과 수년간의 타향살이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조각들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그날 저녁에는 연필을 들고 책상에 앉아 지나온 삶을 종이 위에 연도별로 적어보았다. 처음 캐나다 땅을 밟은 순간의 감정과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 언어의 장벽 앞에서 겪었던 서러움들, 첫사랑의 설렘, 그리고 첫 직장 생활이 내게 준 시련들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옛 조각들을 하나씩 종이 위에 그려나갔다.


그런 조각들이 그려질 때마다 연필은 점점 무디어졌다. 그때 연필깎이를 찾다가 우연히 학창시절에 쓰던 연필을 모아 두었던 상자를 발견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샤프펜슬이나 볼펜보다는 연필을 즐겨 사용하였다. 연필 특유의 냄새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필이 만들어내는 샤샦거림과 또각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틀리면 뒤에 붙어 있는 작은 지우개로 금방 지울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뭉텅해진 연필이 검은색 면도칼을 만나 예쁘게 이발을 하면 다시 날카로워지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사용하던 연필이 작아지면 하얀색 볼펜 몸통에 꽂아서 사용하곤 했다. 너무 작아져서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운 연필들은 상자에 모아두었다. 그것이 하나 둘씩 쌓여 갈 때마다 마치 내 지식도 쌓여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몽당연필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까지 20대 시절의 목표이자 추억이었다.


그것은 내 삶의 보물이 되어 갔고 하얀 종이 위에 많은 것을 기록할 때마다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고 무뎌지면 다시 깎아서 날카로워지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하지만 고급 만년필과 기능성 볼펜들이 화려하게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는 초심과는 다르게 보물1호였던 몽당연필 상자는 서랍 한쪽에 방치되고 말았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빨라지고 화려해진 시대의 연필은 지난날의 아날로그가 되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자판기를 두드리는 것을 떠나 내 목소리를 인식해서 글씨를 대신 써준다. 그러다 틀리면 쉽게 지울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유물이 되어 버린 연필과 연필깎이를 다시 집어 들어 흩어진 조각들을 적다 보니 어느새 훌륭한 이야기가 완성되어 갔다.


나는 서울 달동네에서 태어나 충청도 시골마을로 이사를 가서 유년기를 보내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혼자서 캐나다로 유학 가서 경험했던 일들이 종이 위에 그려질 때마다 감사함이 스며들었다.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시골 마을에서 보낸 사춘기 시절에는 한국 음식이라고는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통조림 죽과 즉석 밥이 전부이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백인 아이들의 조롱을 받으며 바보같이 서 있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지금의 삶이 감사할 뿐이다.


그 당시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고민하다가 결국 군 입대를 핑계로 휴학과 복학 그리고 또 휴학을 반복하며 간신히 졸업했던 일과 어느 한인 슈퍼마켓에서 박봉을 받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일을 그려갈 때는 힘들어서 방황하던 나를 격려해주었던 사람들이 기억나기도 했다.


나는 면접을 본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첫 출근을 위해 출근 가방을 꾸리면서 필통을 정리하였다. 잡다한 형광펜과 볼펜들은 빼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일제 브랜드에서 나온 연필 두 자루와 휴대용 연필깎이, 그리고 연필이 손상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고급 연필 커버와 지우개를 필통에 넣었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출발점 앞에서 연필을 다시 잡게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끄적거림을 천천히 완성하여도 괜찮을 것 같다. 틀려서 지운 지우개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좋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한 조각 한 조각을 연필로 그려보려고 한다. 연필이 무디어지면 차분히 깎아서 다듬을 것이다.


먼 훗날, 몽당연필이 더 이상 손에 쥐기 힘들 정도로 작아져 가며 기록되는 수많은 이야기가 나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준다면 몽당연필과 같은 삶도 괜찮을 것 같다.


그것은 힘 조절에 실패하여 부러져도 날카로운 칼에 베여져 아프겠지만 그래도 깎임을 통해 다시 쓰임 받게 되니 무뎌져 작아진 몽당연필 보다는 부려져서 다시 날카로워진 연필이 더 값어치 있는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깎임이 세상을 가득 채워주는 삶, 내 이야기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눠질 수 있는 삶,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말한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 (Edward Bulwe Lytton, 1803-1873)의 말처럼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삶, 새로운 출발점 위에서 설렘과 함께 쥐게 된 연필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더욱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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