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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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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4-02 08:44 조회1,97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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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ed6c96002f5a13dd8b700ce8655ba72_1583515411_0473.jpg박지향/시인 화가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오전 아홉 시가 지나면서 함박눈으로 변했다. 온 세상이 하얀 설국이다. 오후가 되자 눈은 그치고 남쪽 하늘이 푸른 이마를 드러내었다.  멀리 봉우리마다 흰 눈을 덮은 산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선명했다. 창문을 열고 산을 내려온 눈바람을 집안으로 들여 놓았다. 그 바람에 토분 가득 심은 수선화가 온몸을 흔들었다. 가녀린 꽃대, 그 끝에 만개한 황금빛 수선화는 차가운 바람에도 꽃잎 한 장 떨구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몸을 맡긴 체 노오란 춤을 출 뿐이었다. 가냘픈 체구의 그녀 캐롤과 많이도 닮았다. “오늘 기분 어떠세요?” 하면 “뷰우리풀”이라 답하고 “커피 드세요.” 하고 커피잔을 내려 놓으면 “뷰우리풀”이라 답하는 캐롤. 그녀는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뷰리풀을 외친다. 81년이란 세월이 보여준 그녀의 세상은 그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나?. 말이란 본디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니…

두어 달 전이었다. 출근부에 싸인을 하고 돌아서는데 출입문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는 캐롤이 보였다. 평소처럼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다가가서 보니 절대로 좋은 아침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에서는 점심과 저녁은 다이닝룸에서 직원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드신다. 아침은 다이닝룸옆에 위치한 ‘바’에서 원하시는 분들에게 셀프 서비스로 제공된다. 갖가지 빵과 쥬스 커피와 티가 준비되어 있는데 많아봐야 이십여 분 정도가 이용하신다. 당연히 좌석도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 때고 아무 곳에나 앉을 수 있다. 그런데 캐롤이 먼저와 앉아있는 사람들의 테이블에 합석 하려하자 누군가 앉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굳이 이유는 묻지 않았다. 할머니 캐롤의 손을 잡고 2층에 위치한 ‘바’로 올라 갔다.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최고로 성능 좋은 무기를 꺼냈다. 늘 쓰는데도 효과 만점에 고장도 나지 않는 미소를 앞세워 세상에서 제일 큰 “굿 모닝”을 외쳤다. 그리고는 “빌 하아버지! 오늘 모자가 정말 잘 어울려요.” “엔젤라 할머니! 스웨터 색상 아주 잘 고르셨네요 예뻐요.” “크리스틴 할머니! 오늘 데이트 있으신 가봐요. 머리 하셨네요.”하며 일단 마취를 시킨 뒤에 바로 수술로 들어갔다. “우리들의 친구 캐롤이 여러분과 함께 아침을 드시고 싶어하시는 데 반대하시는 분 안 계시죠?” 하고는 “땡큐”를 연발하면서 이미 의자를 빼내어 할머니를 자리에 앉혀 드렸다. 합석은 시켜 드렸지만 돌아서는 내 마음은 씁쓸했다. 

150센티미터나 될까?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체격의 캐롤은 시야에서 1미터 이상 벗어나면 사물의 식별이 어려운 원거리 장님이다. 또래 할머니들 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일뿐더러 몇 개 없는 치아 때문인지 발음 또한 정확하지가 않다. 손가락은 심각한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 울퉁불퉁하게 뼈마디가 붉어져 나오고 비틀어져서 흡사 고목의 뿌리 같다. 입성은 얼마나 검소한지 육 칠 개월 전 입주하면서 입고 왔던 검정색 바지에 보라색 스웨터와 검정색 자켓을 번갈아 가며 입는다. 스웨터는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보푸라기가 뭉쳐져 있다. 소매 끝은 낡고 줄어 들었는지 비슷한 보라색 실로 뜨개질을 해서 이어 내렸다. 요즘 세상에 그런 옷은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신발이다. 모르긴 해도도 자신의 발보다 두 사이즈는 더 클 것이다. 검정색 가죽으로 된 구두인데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걸을 때 발 등쪽에 생기는 주름진 부분이 하얗게 색이 바래서 희고 검은 줄무늬를 만들었다. 뒤축은 반은 닳아 없어진 골동품 수준이다.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닳아 걸을 때 좌 우로 뒤뚱거리며 걷는다. 영락없는 아기오리다. 좌충우돌 힘겨웠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준 걸음걸이일 것이다. 이 십년은 족히 신었을 듯한 이 낡은 구두만 봐도 고달팠을 그녀의 인생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이런 시설에서 살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변변한 옷 하나 구두 한 켤레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어떻게 입주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궁금해도 회사 규정상 사적인 질문은 하지 못한다. 본인이나 가족이 말을 해 주기전에는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지 일주일에 두번씩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그녀의 조카만 있을 뿐 그 외의 방문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조카는 점심과 저녁 두 끼를 같이 먹고 밤늦게 돌아가는데 점심과 저녁 식사후엔 ‘바’에 앉아 카드게임을 한다. 언제나 똑 같다. 캐롤은 사뭇 진지하게 게임을 한다. 카드만 손에 쥐면 주변에서 불이 나도 모를 만큼 강한 집중력을 보인다.  자신의 손안에 든 카드만 바라볼 뿐 상대방의 얼굴, 주변의 소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상대방이 무슨 패를 쥐었는지 뭘 하는지는 신경도 안 쓴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리라. 반면에 조카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연거푸 커피를 마시는가 하면 가끔 하품을 했다. 캐롤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놀이가 포커였고 조카는 이모를 위해 재미도 없는 카드게임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작은 키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오십 대 후반의 그녀는 모난 구석이라 곤 찾아볼 수 없는 온화한 사람이다. 그녀 또한 언제나 소박한 차림을 하고 왔다. 예의가 바르고 푸근한 인상이 몇 년을 알아온 이웃 같다.

나는 캐롤의 내면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 뼈속까지 아름다운 사람 이란 걸 그녀의 조카 캐틀린으로부터 전해 듣고 알게 되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캐롤은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한 살 아래 여동생과 캐롤은 농장을 가지고 계셨던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는 거칠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매는 끝없는 농장일을 하며 외롭고 힘겨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두 사람은 무엇이든 함께 했고 절대로 헤어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약속했다. 캐롤과 달리 키가 크고 예뻤던 동생은 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하고 농장을 떠나버렸다. 동생이 떠난 후 캐롤은 외로움과 끝없는 농장일로 지쳐 날마다 울었다고 한다. 누가 말했나?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동생은 딸 하나를 낳고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동생의 남편은 아이를 캐롤에게 맡기고 떠나 버렸다. 그렇게 남겨진 딸이 캐틀린이다.

캐롤은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몸으로 조카를 키웠다. 온타리오에 있는 농장을 떠나 애드먼튼으로 애드먼튼에서 오카나간으로 오카나간에서 밴쿠버로 옮겨 다니며 온갖 허드렛일은 다 했다. 친딸보다 더 지극한 사랑과 희생으로 키웠다. 고아원에 보낼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캐틀린은 공부를 잘 했고 착하고 성실해서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계사가 되었다. 그녀의 모습처럼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성격이 그녀의 인생을 잘 굴러 가도록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캐틀린의 남편은 은행원인데 성실함에 반해 결혼을 했다. 아들 셋에 딸 하나 그리고 손자가 다섯이다. 올 여름엔 손자가 하나 더 생긴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는 그녀가 참 예쁘다. 알아갈수록 예쁜 그녀가 깜짝 파티를 준비 중이다. 다가오는 3월이면 82세가 되는 캐롤의 생일엔 모든 가족이 다 모일 거라고 했다. 캐롤은 얼마나 많은 “뷰우리풀”을 외칠지 벌써 상상이 간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이모 캐롤 덕분이라고 믿는 캐틀린과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희망이 조카 캐틀린이었다는 캐롤이 오늘도 포커를 했다. 살아온 모습이 이럴 진데 어찌 눈치나 보고 속임수를 쓸 수 있겠는가? 어디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남의 패는 관심도 없다 그저 내 손에 들어온 패를 가지고 최선을 다 한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캐틀린 또한 마찬 가지다. 생활비 몇 천불 내준다고 생색을 내지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검소하다고 하기 보다는 초라한 이모의 행색이 부끄럽지도 않다. 하품이 나와도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듯 카드를 돌리고, 시간은 금이기 때문에 시간을 이모에게 바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져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황금빛 사랑을 써 내려가는 두 여자, 그들은 몸으로 말한다. “흰 눈을 덮고서도 반드시 봄은 오고, 태양이 빛나는 한 꽃은 피어난다.” 라고… 유리창을 닦는데 수선화 황금빛 얼굴이 자꾸만 웃는다.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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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개 속으로 슬며시 사라진 시인이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미를 정갈한 문장으로 다듬어 낸 수필가로 다시 우리 앞에 섰습니다.
여러 해동안 궁금했던 소식을 한꺼번에 들려준 세 편의 글들이 반갑기만 합니다.  짧지 않은 긴 글을 열성으로 썼습니다.
감동을 가지고 읽으면서 붓을 다시 들어 글을 쓴 시인에게 전합니다. '이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재회'라고.
한힘 shanhim1004@gmail.com

향포님의 댓글

향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작성일

강을 거슬러 올라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를 생각합니다.
십년이라는  세월을 떠 돌아 봐도 내가 돌아갈 곳은 이 곳 이었나봅니다. 
꺾었던 붓을 다시 들고 보니
그리운 이름 보고픈 얼굴들이 산벚꽃처럼  피어 납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고 반겨 주셔서 기쁩니다.
아름다운 재회가 될 수 있도록 예쁘게 걸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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