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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어떤 이별(열여덟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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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0-28 04:44 조회1,5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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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지난밤 일찍 잠든 탓인지 알람도 울리기 한참전인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눈을 떴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날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누운 채로 스트레칭을 한다. 팔, 다리, 목과 어깨, 온몸의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5분여에 걸쳐 하는 작은 몸동작이지만 밤새 굳어 있던 근육들을 무리없이 움직이는데 그만이다. 이렇게 온몸을 풀고 나면 포근한 이불이 더 누워 있자고 사지를 붙들어도 이미 잠 깬 근육들은 쉬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크고 작은 일들로 힘겨운 한주를 보낸 오늘아침, 나는 수고한 내 팔다리를 유혹의 손길에 흔쾌히 넘겨주기로 했다. 며칠 전에 세탁해서 보송보송해진 흰색 린넨 이불을 김밥처럼 온몸으로 돌돌 말며 돌아 누웠다. 그때 뭔가 가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지난밤 잠들기 전에 읽으려고 들고 있던 책이 이불속에 묻혔다가 떨어진 것이었다. 책을 집어 들고 책갈피를 넘기는데 그 속에 카드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2년전 랄프 할아버지의 딸에게서 받은 카드였다. 그러잖아도 요 며칠 할아버지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내 영어 이름인 ‘레이첼’ 이라고 쓰여진 봉투를 열어보니 이십불짜리 별다방 기프트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받아 읽어보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삼 년 전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삼십여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찾아와 공연을 했다. 검정색 연미복에 빨강 나비 타이를 맨 은발의 신사도 있었고 이제 막 마흔고개를 넘은 듯해 보이는 다소 젊은 층에 속하는 남자 단원들과 검정색 긴 드레스에 빨강색 꽃 한송이를 가슴에 달고 한껏 멋을 부린 오륙십 대로 보이는 여자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두 시간여에 걸쳐 펼쳐진 공연동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가 하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삼백명이 넘는 거주지라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누가 왔는지 누가 빠졌는지 알아 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공연이 무르익어갈 무렵 객석 맨 뒷줄 구석자리에 석고상처럼 앉아 계신 랄프 할아버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즈음 그 할아버지는 아무런 이유없이 자주 식사를 거르셨다. 식사시간에 테이블에 앉아서도 소량의 음식을 주문하시고 그것도 다 드시지 않았다. 늘 마음이 쓰이던 할아버지였기에 한겨울 눈 속에 매화라도 만난 듯했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공연이나 행사에 단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허리나 등이 굽지도 않으셨으며 청력과 시력, 거기에 정신까지 맑으셔서 102살이라고 믿기가 쉽지 않은 분이셨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검버섯이 드문드문 핀 마른 고사리 같은 할아버지의 손위에 내 손을 가만히 올려 놓았다. 한참 뒤 할아버지는 다른 쪽 손을 내 손위에 가만히 올려 놓으셨고 그렇게 공연을 지켜보는 동안 할아버지도 나도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합창단과 입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무대와 실내정리를 다 끝내도록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앉아 계셨다.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라 했더니 “누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이미 밤은 깊었고 큰아이를 픽업 해야 했기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까지 모셔 다 드릴 테니 일어나자 했다. 할아버지 특유의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정중히 거절하셨다. “See you tomorrow” 했더니 “I don’t have a tomorrow” 라고 대답하시고는 긴 다리를 옮겨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셨다. 할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쉽게 그 자리를 떠나올 수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내 발길을 붙들었다. 102년의 희로애락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은 딸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를 따라왔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표현할 수 없었던 그 기운은 슬픈 예감이었다. 이틀 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장마비가 왔고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돼 가셨지만 다시 리타이어먼트 홈으로 돌아오시지는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천국행 열차표를 예매해 두고 계셨다. 


이곳에 입주할 시에 모든 입주자들은 반드시 자필로 서명한 입주자 카드를 제출한다. 생년 월일과 병력을 간단하게 기술한 신상명세서다. 특이 사항 란에는 인위적인 생명연장술에 대한 사전 선택권도 명기한다. 생명연장술 이란 심장마비 등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사용, 약물 투여나 인공영양제 투입 등 인위적으로 하는 의료행위를 말한다. 할아버지도 DNR(Do Not Resuscitate) 즉 어떠한 생명 연장술도 받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지를 표기하셨다. 밥 세끼 먹으려고 사느냐고, 모두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이 세상에 미련 따윈 없다고, 이제 지쳤다며 하루바삐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기를 고대하시더니 뜻을 이룬 것이다. 


얼마 전에 그림 소재를 찾다가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그림을 만났다. 19세기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 화가이며 ‘뒷모습의 인물’ 이란 용어를 유행시킬 만큼 뒷모습을 많이 그린 카스파 다비드 프레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라는 작품이다. 가파른 벼랑위에서 안개바다를 내려다보며 고독하게 서 있는 뒷모습의 남자는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연세가 말해주듯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낸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한때 뉴욕의 월 스트리트를 활보하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세상을 호령하던 화려했던 시간은 세월속에 묻혔다. 안개처럼 사라져 가버린 부모형제, 친구들과 세명의 자녀,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먼저 보내고 홀로 남겨져 견뎌야 하는 하루하루가 어쩌면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은 떠나가고 생존만 남은 분들을 어렵지 않게 본다.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 같은 가슴을 안고 혼자서 오래도록 살아남기 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친구들과 형제자매는 물론, 젊은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함께 자식을 낳아 기른 배우자와 엇비슷한 시기에 맞이하는 죽음으로 이 세상과의 인연을 정리할수 있다면 이 또한 축복이 아닐까?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얼마 뒤에 딸이 방문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막내 딸 트레이시였다. 환하게 웃는 그녀 손에는 한 묶음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함께했던 모든 스텝들에게 전해질 감사 카드였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며 나에게 카드를 건네 줄 때는 잡은 내 손을 한동안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녀의 진심이 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친애하는 레이첼로 시작한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기쁘게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당신이 보여준 미소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미소는 무료한 우리 아버지의 일상 중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우리 아버지 볼에 키스해 준 것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키스해 준 당신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나는 “기쁘게 떠나셨다”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믿음에 도달한 할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이 이 한 문장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장례식후 감사카드를 전해주던 그녀 트레이시의 환한 미소를 보고 나는 이미 알았다. 떠난 이도, 보낸 이도 모두가 기쁜 이별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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