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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수필] 가을에 부치는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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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정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0-28 04:53 조회1,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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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깊어진 가을 숲을 걷는다. 싸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세월 속의 시간을 일깨워준다. 절정으로 물든 단풍의 진한 기운을 가슴 가득 채우며, 자연의 섭리를 되돌아본다. 새싹 움트는 연두 빛에 가슴 설레며 희망을 엿보던 유년 시절, 푸른 빛으로의 변화가 고통스러웠던 성숙의 시간을 거쳐 왔을 것이다. 한 조각의 햇볕이라도 더 받기 위해 발꿈치를 올리는 치열했던 경쟁도, 자신의 그늘에 자신의 일부가 죽어 가기도 했을 것이다. 떨어지기 위하여 가벼워지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한 생. 그 결실을 위해 묵묵히 떨켜를 만드는 숲의 한가운데 서서, 나는 자연의 순환 속 어느 시점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해 본다.

 

  얼마 전, 채 물들지 못하고 일찍 떨어진 죽음이 있어 고국에 다녀왔다. 췌장암이 발견된 지 삼 개월을 못 넘기고 떠나야만 했던 조카며느리였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두 마디 말을 남겼다. 책임과 사랑. 이는 곧, 삶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이며 삶의 이유가 아닌가. 수고의 짠맛과 성취의 단맛을 동반하는 책임은 쉽게 살 수만은 없는 삶의 무게이자 가치이며, 살아가는 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마저도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불과 3개월 전, 고국에 나갔을 때만 해도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기던 그녀였기에, 생과 사의 경계가 없음을 뼈아프게 새기는 시간이었다. 늘 타인이나 이웃의 죽음을 접하면서도 죽음은 나와는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렇듯 가까이, 또 갑작스럽게 가는 젊은 죽음을 보며 내게 주어진 시간, 하루하루가 덤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는 해골을 항상 방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깨우침과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 내릴지 모르는 시간 열차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노인대학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수강생들의 연령대가 높았다. 그중 한 분이 나이가 아주 많다고 했다. 한 팔십 세쯤 되셨을까 하며 여쭤보니,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로 얼굴을 붉히며 이미 구십 고개를 넘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겉모습만으로는 전혀 나이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균형 잡힌 몸에 꼿꼿한 자세, 단정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게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는 그분의 어조에는, 삶의 의지와 해탈한 듯한 초연함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모든 책임을 벗은 지금, 평생 해보고 싶었으나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 왔다며, 사는 날까지 육체와 정신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의무이니 운동 삼아 해보겠다고 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고, 계속 자기 계발에 힘써 왔기에 저렇듯 건강하고 곱게 늙지 않았나 싶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길어졌고 백세 시대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실을 진즉에 인지하지 못한 채 늦었다고 체념했던 많은 일들이 아쉬움으로 발목을 잡는다.

 

  재능 기부로 봉사한다는 뿌듯함을 갖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다. 오늘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어르신들의 열정을 통해, 도리어 노년의 삶의 방식과 에너지를 전수받게 되었다.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지고의 복이지만, 노년이라 일컫는 나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축복이라 할 수 있겠다. 사는 날까지 정신과 육체가 일치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신이 먼저 시들게 된다면 나의 내면의 모습이 지금의 나와 많이 다르지 않도록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곱게 물든 단풍잎이 가슴에 머무는 이유는 하나하나의 잎에 그들 생의 흔적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번민과 회한의 앙금이 차곡차곡 포개져,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전히 마음을 비울 때, 드러나는 색색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해는 저물 때 온 세상을 풍요롭게 물들이듯. 나뭇잎 또한 노년으로 물들어야 아름다움으로 결실을 맺으니, 늙어야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아니든가. 나 역시 갑옷처럼 걸쳐진 책임을 벗을 때,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을지. 내 남은 생에는 그 근원적 물음에 매달려 볼 것이다.

 

  가던 걸음 멈추고 사유로 숨을 고르는,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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