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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딱 하루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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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1-12 09:12 조회1,62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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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누굴까?” 나는 사흘 밤낮을 머리위로 둥둥 떠 다니는 물음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누군가 내 차 손잡이에 잘 익은 토마토 한 알을 비닐봉투에 담아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범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내가 실눈을 치켜 뜨고 프로파일링을 시작했다. 첫째, 나의 출 퇴근 시간을 잘 아는 사람이다. 둘째, 사소함이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다. 셋째, 사려 깊은 사람이다.


토마토를 받은 다음날, 물망에 오른 분들과 마주칠 때면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입술로는 부인할 수 있지만 눈빛은 속일 수 없을 터이니 촘촘하게 거미줄을 쳐 놓고 촉각을 곤 두 세워 탐색했지만 사흘이 가도록 아무런 단서도 걸려 들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가겠는데’ 라고 혼잣말을 하며 빌딩을 나서는데 뒤따라 나오시던 할머니 세라가 “토마토 먹었어?” 하셨다. 어이없게도 범인은 물망에도 없던 세라 할머니였다. 


말수가 적은 할머니는 150센티나 될까 싶은 자그마한 키에 적당히 살이 오른 체격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다. 눈에 띄는 행동도 하지 않으셨고 까다로운 요구나 불평 불만도 없으셨다. 그렇다고 과하게 칭찬을 하거나 과한 감정의 표현도 잘 하지 않으신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중후한 톤의 회보라 색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백인들은 작은 친절이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 사람에게도 땡큐 베리 마치를 두세 번씩 하는,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문화이다 보니 할머니의 절제된 감정이나 감사표현은 가끔 오해를 불렀다. 차갑다, 감사를 모른다, 캐네디언인 그녀를 두고 영어를 못한다는 둥, 무책임한 억측들이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의 입 속에 흥건했다. 오래도록 관심을 가지고 봐야 제대로 보이는 꽃 보랏빛 수국의 속살을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수국은 토양성분과 햇살의 강도에 따라 꽃의 색깔이 변하는 신비한 꽃이다. 꽃말 또한 냉정 무정 변심 변덕 교만 허풍 바람둥이 진심 등 변화하는 꽃의 색깔만큼이나 많다. 할머니를 닮은 빛깔 보랏빛 수국의 꽃말을 찾아보니 ’진심’이다. 고운 자태와 달리 수국은 향기 없는 꽃이다. 진심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할머니는 코로 맡을 수 있는 향은 없지만 꽃향기가 전하지 못하는 향기를 뿜어내는 보랏빛 수국이다. 


수국 같은 할머니 마음은 사진으로 찍어 저장하고 주먹만 한 토마토는 깨끗이 씻어 잘랐다. 얼음물에 씻은 갖가지 새싹 채소를 커다란 볼에 담고 깍뚝 썬 아보카도, 아몬드, 호두를 섞어 주었다. 노릇하게 팬에 구워 식힌 두부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화룡점정 조그맣게 썬 새빨간 토마토를 올리자 알록달록한 색감만으로도 식욕을 일게 하는 근사한 샐러드가 되었다. 올리브유와 레몬즙, 후추, 간장을 섞어 간단하게 만든 드레싱을 작은 볼에 담아 샐러드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흔한 토마토 한 알이 이렇게 예뻐 보이기는 처음이라는 가족들의 포크가 바쁘게 오갔다. 


흔하고 흔한 것이 토마토라지만 모두가 같은 토마토는 아니다. 작은 베란다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할머니의 관심과 정성으로 자란 귀한 과실이다. 그녀의 사랑이 농축되어 빨갛게 익은 토마토는 모두 세 개였다. 할머니는 각각의 토마토에 바비, 티미, 타미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셨다. 바비는 당신이 드시고 티미는 가까이 지내시는 할머니 로즈에게 그리고 나머지 타미는 아무도 모르게 내 차에 걸어 두셨다. 


세라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린 적도 없는 초라한 인생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고 “제법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하신다. 왜 아니겠는가? 그 귀한 토마토를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버리면 그만인 나 같은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큰 마음이시니 그 큰 마음에 담아 놓은 행복이 차고 넘칠 것이다. 


“기억에 남는 건 드라마틱 한 것도, 크고 대단한 것도 아니더군, 가난했던 젊은 시절, 남편과 나는 햄버거 한 개를 사서 둘이 나눠 먹었는데 서로 큰 쪽을 먹으라고 싸우던 그날이 좋았 어”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시더니 “바깥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려도 잠자리는 춥지 않았지, 남편은 나를 언제나 애기처럼 꼭 껴안고 잤거든”하시며 먹을 게 없어도 강추위가 닥쳐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을 골라 내셨다. “한번은 벌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큰 아들이 벌을 잡는다고 설치다가 입술을 쏘였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입술을 하고 학교를 가는데 얼마나 대견하고 이쁘던지…” 하시며 가슴속에 쌓아 둔 소중한 추억들을 조금씩 열어 보이셨다. 


그러고보니 내 기억에 남아있는 순간도 대단한 사건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다. 초등학생이던 큰아이가 하교길에 꺾어 다 주던 작은 풀꽃 한 송이, 동그란 얼굴에 목은 없고 얼굴에서 바로 팔다리가 달린 오징어같은 엄마를 그려 놓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엄마”라고 써준 작은딸의 그림편지, 바닷가에서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올 때 모래투성이가 된 발을 생수를 사다 씻어주던 남편의 손길, 이 작고 사소한 일들이 모여 내 인생이 되었다.


5년전 할머니의 남편 프레드는 “먼저 가서 기다릴 게” 라며 다시 만날 약속을 남기고 천국으로 가셨다. “우리 모두는 임무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하시는 할머니는 자신이 받은 임무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자부하셨다. 고아였던 남자친구 프레드가 주저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먼저 청혼을 하고 부모이자 아내가 되어 평생을 할아버지의 집이 되셨다. 생계를 이어 나가기조차 힘들었던 불법체류자의 딸을 입양해 당당한 캐나다인으로 키웠고 성장한 딸을 돌려 달라는 친부모에게 기꺼이 보내주었다. “내게 주신 두 아들은 모두 주님께 드렸어, 큰아들은 신부님이 되어 필리핀으로, 작은 아들은 오래전에 주님 곁으로 보냈지…” 하는 목소리가 바람 한점 없이 잔잔한 호수 같다. 


둘째 아들은 천국으로 보내고, 입양해 키운 딸은 친부모가 있는 대륙으로, 큰아들은 주의 종으로 모두가 먼 곳으로 가 있다. 남편마저 천국으로 보내시고는 “딱 하루만 살자 했어” 하신다. 하루 하루 버티다 보니 오늘까지 살았다는 할머니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시다. 산책길에 만나는 길고양이들의 밥도 챙겨야 하고 익기 시작한 토마토 이름도 지어야 한다. 혹여나 백인들 틈에 끼인 동양여자 하나 소외 당하지나 않을까 마음도 써야 하니 건강하게 깨어 있어야한다.


키 작은 순례자의 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던 저녁, 나를 배웅하시던 키 작은 거인 앞에 자꾸만 작아지던 내가 “후회하는 일 있으세요?” 했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내 인생에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어” 하셨다.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 했으며 치열하게 살고 뜨겁게 사랑했다. 그러니 미련도 후회도 없는 인생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 것이다. 


누군가는 버텨냈을 하루가 밤을 부르는 시각, 치열한 사랑도 아낌없이 내어준 그 무엇도 없는 내 인생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대신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생명을 구한적도 없는 초라한 인생이었다”는 세라 할머니 순종의 삶을 순백의 아마포로 닦아 머리맡에 두었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해봐도 잠들지 못하는 불 꺼진 방안엔, 물음표 하나 밤새도록 둥둥 떠 다녔다. ”네 생이 끝날 때, 너는 후회없이 살았다 말할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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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갈수록 녹익어 가는 글이 삶의 의미를 새겨보게 만드네요.
글도 쓰는 사람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삶의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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