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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여자는 늪이다 (스무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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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1-25 08:42 조회1,2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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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꿈이었다. 벌써 몇 년째 꾸는 똑 같은 꿈이다. 꿈에 초록빛 투명한 바다는 오렌지색 작은 섬 하나를 언제나 내 발 밑으로 밀어다 놓는다. 잊을 만하면 다가서는 섬은 한번도 가 본적 없는 크레타다. 


그리스 본토 아래쪽에 위치한 크레타는 대학시절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곳’ 이었다. 모든 신들의 왕 제우스의 고향이며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원지인 크레타는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에 지배당하지 않은 독특한 미노아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이 선물한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이집트가 중시 여긴 사후세계가 아닌 현세의 삶을 사랑한 이들의 흔적을 찾아, 언젠가는 가리라 생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우연히 대출한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는 ‘언젠가’ 하던 내 맘이 ‘꼭 가고 싶은’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섬이다. 


 서양 문학과 문화는 크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양대 산맥이 대립과 융합, 교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리스인의 인본주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 헬레니즘과 유대인의 신본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헤브라이즘을 간과하고 서양문학과 문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 두 산맥 중 하나 그리스 크레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 오렌지 꽃향기가 온 섬에 가득했다. 심장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 때까지 오렌지 꽃물을 마신 내가 미노아 문명의 진수 크노소스 궁전을 걷고 있었다. 나는 섬이 끝나는 곳에서 현실에서 외치지 못한 욕망을 꿈에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자유다.”   


소설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뜨겁게 살고 사랑했던 남자 조르바는 결혼자금을 몽땅 털어 산 악기 산투르를 매고 그의 두목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그 섬에, 여자들에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었고 남자들에겐 가지고 싶어도 손 닿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젊고 아름다운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녀가 마녀사냥으로 죽던 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쓰러진 광장에 떨어진 오렌지 꽃다발... 부활절 아침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려고 만들었던 꽃다발이었다. 젊은 과부가 보내준 오렌지를 베어 물며 가슴이 기쁨으로 터질 것 같았다는 두목이 “오렌지 나무 너머에서 바다가 여자처럼 한숨짓는 소리를 밤새도록 들었다”는 섬, 크레타는 슬프고도 향기로운 오렌지 빛이다. 


두목에게 책 같은 것일 랑 내다 버리라고 하는 조르바는 책과는 거리가 먼, 날 것 그대로의 노인이다. 60이 넘은 노인이라 표현 하지만 패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다. 한 여자를 사랑할 때는 오직 그 여자만을 사랑했고 춤을 출 땐 춤에만 열중했으며 땅을 팔 때는 땅만파는 남자였다. 두목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배워가던 생의 진리를 조르바는 삶에서 체득한 스승이었다. 육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추워서 결혼했다는 그가 한 여자에게 정착하고 아이를 낳고 그녀의 품에서 생을 마감한다.


소설 속 주인공 조르바는 죽고 없지만 조르바의 길을 걷는 남자 토니를 만나면서 부터 크레타는 또 다시 내 게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토니는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살고 사랑했지만 그와는 달리 독서가 취미인 78세의 할아버지다. 토니 할아버지도, 추워서 결혼했다는 조르바처럼 추워서 결혼을 하신다. 


큰 키에 미남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 언변까지 뛰어난 할아버지는, 사람들 특히 여자의 가려운 곳이 어딘 지를 잘 아시는 분이다. 홀로되신 할아버지보다 홀로 인 할머니가 훨씬 많은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에서 연예인 못 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계신다. 평소에 화장을 잘 하지 않는 앤 할머니가 화장을 곱게 하고 나오신 적이 있었다. “실내가 훤해진 이유가 당신 때문이었군”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핏기 없던 할머니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셨다. 제나 할머니가 쿠키를 구워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분들께 나눠 주었을 땐 “이런 쿠키라면 난 한달동안 이것만 먹으라고 해도 먹겠어”라며 수고한 손길을 기쁘게 하셨다. 


정답지를 들고 계신 듯, 여자가 원하는 대답, 궁금증, 필요, 여자가 토라지는지는 이유까지 잘 읽고 쓰다듬으시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할아버지가 결혼을 결정하기 전, 할머니들 중 몇 분은 적극적으로 할아버지 맘을 얻고자 애쓰셨다. 손수 뜬 머플러를 선물하시는 분도 계시고 모자나 책을 선물하시는 분도 몇 분 계셨다. 할아버지는 선물한 책을 읽고 선물한 모자와 머플러를 번갈아 쓰고 나오셔서 건네 준 손길이 즐겁도록 하셨다. 


이렇듯 매력 있고 인기 많은 할아버지가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독신으로 사셨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다 모인 화원에서 꽃을 고를 때 수많은 꽃 중 딱 하나만 고르라면 고르기가 쉽지 않은 이유와 같았을까? 수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사랑했지만 결혼으로 맺은 인연은 없었다. 조르바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에 매이는 걸 싫어하시는 지라 한가지 일을 오래도록 하지 못했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셨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젊은 시절 “여자는 꿀과 같아서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이라 생각했다. 사랑하던 여자가 결혼을 말하는 순간 사랑이 식었다는 할아버지가 72세 할머니 낸시라는 늪으로 들어가신다. 꿀로 채워진 황홀한 늪이다. “방이 너무 추워, 36도로는 안돼 또다른 36도가 필요해” 라며 껄껄 웃으셨다.


자유분방의 표상이었던 조르바가 결국에는 추위를 핑계삼아 한 여인에게 정착한 것처럼, 토니 할아버지 또한 결국은 유목민의 길을 던지고 정착민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꿈꾸면서 누군가에게 매이기를 원하고, 매이기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한다. 너무 가까이 당겨 숨막히게 하지 말고 긴 끈으로 묶으라는 할아버지가 “이제 결혼할 준비가 됐 어” 하신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쩌 구 하던 가사가 슬그머니 내 입 속을 다녀간다. 사랑하기 늦은 나이는 없고 결혼하기 늦은 나이도 없다. 할머니는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할아버지를 위해 고양이를 포기하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평생을 피우던 담배를 포기하셨다. 


이렇듯 노인의 사랑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다그치지 않는다. 내 것을 덜어낸 자리에 당신으로 채우는 애틋한 사랑이다. 그러니 가을 강처럼 고요히 깊어 가는 노인들의 지고 지순한 사랑을 어느 누가 ‘주책없다’ 하겠는가. 사랑할 때 늙지도 시들지도 않는 간절한 나이 일흔 둘, 일흔 여덟,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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