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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외부투고] 동태 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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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정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16 08:58 조회1,4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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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처럼 아내와 한아름마트 생선코너에 들렸더니  싱싱한 동태(생태) 가 많이 쌓여있어서 바로 사가지고   돌아왔다.나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동태(생태)하면  6.25  사변을 겪었던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난다.나는 겨울이면 날씨가 제법 추워서 감기에 자주 걸리곤했다.그러면 한약방에가서 약을 지어다 먹곤하였는데  약을 받으려면 기다려야 했는데 저녁시간이 될때면 그집식들이 옹기 종기 둘러앉아서 동태 찌게를 가운데 놓고 열심히 식사를 했다.이것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던 시절이었고 그당시 동해에서는 동태가 참으로 많이 잡혔다.정말 하나님의 축복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이  즐기는 동태 가 여러종류 있는데  산악지역에서 말린 육질이부드러운것으로 숙취해소용으로 황태가 있고 숙취해소 건태용으로  북어가 있으며 반건조시킨것으로 생태와 북어의 중간으로 조림이나 튀김용인 코다리가 있고 명태 새끼로 술안주용인 노가리가 있다.


그리고 빼놓을수 없는 명란이 있는데 너무나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탕으로도 애용한다.매웁게 만든것으로 일본 명란과는 대조적이다.뉴욕 에 “금강산” 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의 알탕 찌게는 알을 10개쯤은 올려주어서 유학생들이 먹고 남은것을 싸가지고 간다.


내가 어린시절  우리가족이  6.25 당시는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1.4 후퇴에 안성으로 피난을 갔는데 소가 끄는 달구지의 짐위에  올라타서  눈보라속에서도 이동하던 생각이 난다.


아내는 부산으로 피난을 했는데 기차 위에 서 부산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피난 시절  안성에서  매주 한번 장터가 열리면 어머니 가 시집오실때 갖고오신 패물을 팔아서 새우젖(아주 비싸고 귀한음식)을 사오셨는데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만 조금줄 정도였다.


회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밖에 나가서 용변을 보다가 하늘에서 전투기 소리가 나면 그대로 집으로 들어오곤 한 시절이 생각난다.배추 잎사귀로 휴지를 대신하였다.

다행이도 할아버지가 영어를 잘 하셔서 미군부대의 누룽지는 우리 식구가 마음껏 먹을수 있었다.쬬코렛과 껌 그리고 치즈도  많이 얻어먹었다.


9.28 서울 수복후 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국민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먹을것이 귀하니 심지어 까끌 까끌한 쌀겨로 게떡을 빚어먹기도 했고 다행이도 밀가루는 미군원조로 넉넉하여서 그래도 수제비와 칼국수는 계속 먹을수 있었다.밀가루 찐빵도 감자와 함께 신물이 나도록 먹은 기억이 난다.


보리고개가 오면 보리도 떨어져서 보리 깜부기도 따먹곤하였다.개구리도 잡아먹고…

메뚜기도 잡아먹고…까마중도 먹고.


이 당시에 “꿀꿀이 죽”이라는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미군부대에서 먹다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끓인것으로 가격은 5원 하였고 전중윤 삼양라면 명예 회장은 남대문 시장에서 이것을 먹으려고 줄을서있는 사람들을보고 너무나 안타가운 마음을 억제 할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짜장면은 50원 할때인데 그당시 제일 생명사장( 현 전중윤 삼양라면 명예 회장)이  국민들의 주식인 쌀이 모자라서  국내 식량문제 자급자족 을 위해서  고민하다가  일본의  라면 회사인 묘조식품 사장을 통해  라면기계 2대를 $100.000  에 구입을 하였고  이 자금은 그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부흥부  예산 의 거의 대부분을 투입하게되었다.


라면을  일반 국민에게 보급하게 되었고  삼양라면이 1963 년에 탄생하였다 .그당시  라면 가격은 10원이었다.정말로 가난한 나라였다.


마시는 물도 수도시설이 빈약하여서  어린 나이에도 아현동 굴레방다리 까지 가서 오래 기다리다가 물지게를 지고  날라다 먹어야 하였다.


햇볕이 나는 날은 빨래 하는 날이고 속옷을 벗어서 이를 잡곤 하였다.이발소 에가면 이발기계를 소독을 하지 않아서 기계충이란 고약한 병이 옮겨지곤 하였다.


목욕탕은 한달에 한번 가게되는데 탕위에는 때가 둥둥떠있어서 매미채로 건져내곤하였다.


학교는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조게탄을 태워서 난로를 피웠는데 교실안에 안개가 자옥하고 도시락을 데우느라 난로 위에 올려놓아서 김치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겨울에는양말은 없고 버선을 신고 다녔으며 솜바지 저고리와 추위를 피하노라 도깨비 모자를 눈만 가리고 쓰고 다녔다.


옷은 자주 빨수가 없어서 검은색과 흰색으로 입고 다녔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C- ration box   에 들어있는 고기를 얻어먹는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주일학교는 교회에  의자가 없고 차가운 마루박닥에서 솜바지 입고 버선 신고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학교에서 미군원조 물자인 학용품을 받을때는 정말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벙어리 장갑. 연필. 노트. 지우게…….


대한민국이 지금은 너무나  풍요하지 않은가?그러나 온 나라가 불평불만과 우울증과 부동산 투기와 공짜 복지 지원금과  Populism 과  진영논리로 좌파 우파가  갈라져 있고 경제는 너무 어려운데 매일 정치싸움만 계속하고 있으니 정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정말  가보아야 정신을 차릴런지!!!


홍준표 의원이 언급한대로 과거 70년 동안 피땀흘려 쌓은 경제와 국가 신용을  실물경제 경험도 없고 대학다닐 때에  데모만 하던  무능하고 건달들의 모임인 주사파 중심의 민노총 전교조 압력을 받고 있는  문재인 정권이  3년만에 다 들어먹었다고 한다.앞으로 후세에게 엄청난 부채를 넘겨주고  피눈물과 고통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세대를 보게될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고국을 보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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