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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아름다운 타인 (스물세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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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1-05 12:31 조회1,74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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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6분 5초짜리 짧은 동영상을 열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명동성당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간다.  남자는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그은 뒤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조용히 엎드렸다. 아주 낮은 자세로 백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였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소용돌이속에서 “위기의 시간 일상의 평화가 돌아오길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주 예수여 당신을 소리쳐 부릅니다’를 연주한다.” 한음 한음 건반을 누를 때마다 흘러나오는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소리 나도 온 마음을 넙죽 엎드리고 말았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의 비밀경찰이던 냉혈한 비즐러도 한 곡의 피아노 소나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비즐러는 국민들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목표 하에 10만명이 넘는 비밀경찰들이 국민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던 유능한 정보국 요원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유명 여배우 크리스타를 욕망하던 헴프 장관의 지시하에 자신의 신념대로 동독의 촉망받는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던 크리스타를 감시하게 된다. 너무 가까이 다가섰던 탓일까. 그들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감시 감청 하면서 상부에 고발해야 할 드라이만의 반역을 눈감아주고 그들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랑과 예술, 삶의 의미를 배우고 느끼면서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그의 인간성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피아노곡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감청 하면서는 음악이 주는 황홀경에 카타르시스까지 경험하게 된다. 연주를 마친 드라이만이 “이 곡을 진심으로 듣고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 하고 비즐러의 볼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영화에서 헴프장관은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모르는 사냥개 같았던 비즐러가 변하듯 사람은 변한다. 변화의 동기는 위대한 사상이나 대단한 사건이 아닌 한 곡의 음악, 한편의 영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인생관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인생역전 스토리는 얼마든지 있다. 역전 인생이나 인생관까지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고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마법을 보여준다.

 

3년전 가을 이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옆에 앉으셨던 이정숙 권사님께서 “요즘 왜 글을 안 써요? 나, 지향 자매님 글 참 좋아해” 하시며 전화번호를 적어 주셨다. 설익은 글,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허접 하고 부끄러운 글을, 쓰다 보면 익는 날 있을 터이니 다시 써 보라고 내게도 잊혀져 가던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몇 년 전이었다. 남편의 비즈니스가 일전짜리 페니 한 개 챙기지 못하고 문을 닫으면서 불어난 카드 대금에 언제 고 형편 될때 갚으라며 빌려준 언니의 돈까지, 갚아야할 빚이 눈덩이처럼 구르고 있었다. 어깨가 허리까지 내려온 남편과 어린 두 딸의 엄마였던 나는 펼쳐져 있던 이젤과 책상을 접었다. 당장 돈이 들어오는 일이 웨이트리스라 하기에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둘렀다. 내 키보다 높이 쌓인 접시를 나르고 커피를 따르며 “밥부터 벌자 ”했다. 그렇게 잠시 접자 했던 책상과의 거리는 멀어져 갔고 나도 모르게 닫아버린 창틀엔 새파랗게 눈뜬 이끼가 두텁게 자라고 있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방안에 잠든 나에게 권사님의 그 한마디는 이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라는 기상 나팔 소리였다. 나팔소리에 잠 깨어 돌아보니 세상을 향해 열린 문과 창을 닫고 산 세월이 10년이었다.

 

다시 책상을 펴고 붓을 들자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빛깔과 향기로 다가왔다. 아침마다 수상한 외출을 하시는 할아버지 에드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고 수척 해가는 수잔 할머니 얼굴에 핀 검버섯 개수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잡는 일이 즐거웠고 약은 드셨는지 기분은 어떤지 묻고 다독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늘 그날이 그날인 노인들의 느린 일상이 매일 새로운 풍경으로 다채롭게 펼쳐지면서 나팔 할머니의 소란스러운 나팔소리조차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들려왔다. 빌딩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야 하고, 듣고 본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를 즐겨하시는 분, 나팔 할머니 소피아를 쫓아다니는 내 눈가엔 어느새 미소가 번지고 수다가 늘어났다.

 

이 곳 리타이어먼트 홈에서는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입주자들을 위해 게시판은 물론 엘리베이터 복도 할 것없이 각종 행사나 알림 사항을 곳곳에 붙여 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친절하신 할머니 소피아는“오늘 오후 7시에 음악회가 1층 행사장에서 열리는 것 알고 있지?” 하시고, 이번 토요일 밤 영화는 알파치노 주연의 대부야 ”하고 알려주신다. 한여름에도 추위를 호소하시는 조앤 할머니에게 “몸이 그렇게 찬데 왜 찬물을 마셔? 따뜻한 물을 마셔 야지” 하며 뜨거운 물을 따라 주시고 “새로 들어온 이벤트 코디네이터 가 한국인이래” 하고 내 출신국까지 알려 주셨다. 이런 할머니의 친절은 치매가 시작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인지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건강하신 분들에게는 ‘오지랖 넓은 나팔’ 이다.

 

할머니는 이 오지랖을 빌딩내 소방훈련이 있는 날에 제대로 펼쳐 보여주신다. 훈련이 있을 때는 미리 날짜와 시간을 개인적으로 서면 통보하고 직접 대면해서 꼼꼼하게 알려드린다. 그렇게 일일이 챙겨도 잊어버리고, 화재경보기 소리에 놀라시는 분과 벨 소리를 듣고도 대피 훈련에 참가하지 않는 분도 계신다. 그럴 땐 참석하지 않는 한 사람, 앤을 기억하고 계신 소피아 할머니의 나팔은 화재경보기가 흉내내지 못하는 위력을 발휘하신다. “에고 이 여자야, 진짜 불 나면 어쩌려고 이렇게 누워있어, 나가자, 일어나” 하며 고래고래 소리 치신다. 그러면 요란한 화재경보기가 울어도 태평스럽게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소피아 할머니 나팔소리에 이끌려 나오신다.  목소리도 모습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내가 한동안 심취해 있던 영국태생의 트럼펫 솔리스트 앨리슨 발솜도 소피아 할머니의 아름다운 나팔소리를 따라오지 못한다. 트럼펫의 여제라 불리며 세계적인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이건만 소피아 할머니 앞에선 빛을 잃는다. 부, 명예, 인기,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을 향한 연민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광을 낸 할머니의 나팔소리는 그녀의 화려한 이력으로 다가 설수 없는 순도 백 프로 사랑일 터이니...  할머니는 누가 뭐라고 뒷담화를 해도   상관치 않는다. 내가 해 야할 일은 나팔부는 일, 그 소명을 오늘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소명을 살아 내시는 분들로 인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미소 짓는 것 일터이다.

 

한동안 잃었던 미소를 되찾고 꺾었던 붓을 다시 들자 이번엔 치어리더로 변신한 권사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장황한 글을 꼼꼼히 챙겨 읽으시고는 단 한번도 지나치지 않고 정성스런 감상문을 보내주신다. 내가 보지 못한 삶의 통찰,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기도와 함께 보내주신다. 스무 번의 긴긴 감상문을 받은 뒤 “권사님 덕분입니다” 했다. 그러자 “내가 뭘 했다구,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이 늙은이를 도구로 써 주셨구먼, 감사하네 감사해 ”하시며 언제나처럼 당신은 한걸음 뒤로 물러 나셨다.

 

마스크 없는 세상, 맘껏 떠들고 웃는 새해를 소망하며 아직은 희뿌연 창밖을 내다본다. 나팔 불어 깨우시고 뒤로 물러나는 결 고운 사랑, 오지랖 넓다는 비아냥쯤 소명과 바꾸지 않는 믿음,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두 연인을 보호해 주었던 아름다운 남자 비즐러의 희생을 들고 2021년 새해 첫 걸음을 내딛는다. 오랜 시간 타인이었던, 결코 타인일수 없는 타인의 삶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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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힘님의 댓글

한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난은 극복하라고 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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