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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은밀한 파수꾼 (스물일곱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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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3-03 09:17 조회1,8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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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세상은 권력자나 목소리 크고 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변하고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목소리도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변하고 유지된다. 청소부나 가게 점원, 버스기사, 요즈음처럼 코로나 팬데믹이 선포된 상황에선 특히나 집으로 생필품을 배달해 주는 택배기사나 의사 간호사 및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언 땅을 일구어 씨 뿌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세상을 지키는 은밀한 *파수꾼이다. 

 

쓰레기를 보면서 세상을 배웠다”는 분을 만났다. 영어도 안되고 친구도 없던 이민초창기 번뇌와 갈등 속에서 발견한 탈출구가 청소일 이었다는 63세 김광수씨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할거라고 하셨으니 오늘처럼 거센 바람이 부는 날에도 거리로 나설 것이다. 자원봉사로 택한 거리청소는 명예가 따라오는 것도 보수가 주어지는 일도,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닌 이 일을 18년째 하고 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에서 제공하는 안전조끼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시에서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조끼 한 장에 안전을 맡기고 하루에 다섯 시간 거리 청소를 하는 그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내가 기도하는 시간”이라 했다. 깨진 술병, 주사기, 비닐봉지, 개똥 등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별의 별것들이 다 널 부러져있는 세상을 몸으로 읽고 손끝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배신 때문에 누군가는 유혹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생의 기로에서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인들…. 그들의 한끼 밥이 되어줄 빈 병을 줍는 일은 이제 버릴 수 없는 그의 삶이 되었다. 넥타이를 매고 교단에 서는 일 보다 더 보람되다는 김광수씨의 발길이 지나가고 난 거리에 바람이 불면, 거리는 온통 피지도 않은 아카시아 향으로 가득하게 된다. 

 

아카시아 향처럼 향기롭지는 않으나 봄이면 잔디밭에도 길가에도 흔하게 피는 민들레꽃 같은 할머니 수잔도 그런 특별한 보통사람들 중 한 분이다. 자동차의 매연이나 행인들의 발길, 한겨울 매서운 바람까지도 이겨내고 결국에는 꽃을 피우고 마는 민들레 같은 분이다.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으며 일궈낸 인생이었는지 “바람이 불면 알게 되지, 알곡인지 쭉정인지, 암, 바람이 불면 알 수 있고말고" 라며 넋두리처럼 말씀하시던 할머니가 한번은 큼지막한 가위를 들고 나타나셨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계신 분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에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작은 할머니가  “자르자, 모두 다 잘라 놔야 해" 하시며 냅킨을 내 놓으라고 언성을 높이셨다.  입 한번 닦고 버리는 커다란 냅킨을 반으로 잘라 한 장으로 두 번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자유롭게 맘껏 드시라고 준비해둔 쿠키나 머핀도 한 두개 드실 만큼만 가져 가시고 여기저기 편히 쓰시라고 쌓아둔 냅킨을 흥청망청 쓰시는 일도 방으로 가져 가시는 일도 없는 깔끔한 분이셨다. 일회용품은 사용하시는걸 본 적이 없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가 있으면 반드시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셨다. 식사 시간이면 많은 분들이 마시지 않아도 기본으로 챙기시는 커피나 티도 마실 마음이 없는 날엔 커피잔은 엎어놓고 1인분을 다 못 드실 땐 반만 청해서 콩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드셨다. 필요할 땐 냅킨 한 장을 잘라 반만 쓰고 반은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음에 사용하셨다.  

 

그랬던 할머니가 언제부터인가 냅킨을 탐내기 시작했다. 식탁에서든 어디에서건 냅킨만 보이면 집어가시더니 급기야 쓰레기통에 쓰고 버린 냅킨까지 집어 가셨다. 커피, 딸기잼, 크림, 각종 음식물을 닦고 버린 냅킨을 반듯하게 편 뒤 할머니방안 여기저기에 탑처럼 쌓아 두셨다. 방 청소를 하는 도우미들이 쌓여있는 더러운 냅킨을 생각 없이 버렸다가 혼쭐이 났다. 뭐든 아껴 쓰지 않고 아까운 줄도 모르고 자기 돈 주고 산 것 아니라 아낄 줄 모른다며 “나무 한 그루 심어 본적 없는 것들이 나무의 고마움도 모를 뿐더러 생각도 없이 사는 한심한 것들, 너희들은 말로만 자연보호, 말로만 사랑하라 떠들어대는 위선자들”이라고 한바탕 훈계를 들어야 했다. 치매가 시작된 것인 줄도 모르고 “더러운 늙은이”라고 욕했던 도우미도 이제는 냅킨 한 장을 반으로 나눠 두 번 사용하고 음식도 먹을 만큼만 가져 간다.

 

치매가 심해지면서 롱텀 케어홈으로 떠나신 할머니는 근검 절약이 몸에 베인 욕심 없고 정직한 분이었다. 반짝이는 하얀 단발머리에 몇 년을 입었는지 목이 늘어져 후줄근해진 티셔츠와 검정색 바지, 낡은 흰색 운동화를 언제나 깨끗이 세탁해 신고 다니셨다. 바람이 불고 난 뒤 잃었던 딸을 되 찾았다는 할머니는 네 아이의 엄마였다.

 

지금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가장으로 사회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때는 모두 순번을 정해놓은 것처럼 돌아가며 말썽을 부리고 크고 작은 바람을 몰고 다녔다. 가장 큰 바람을 몰고 온건 둘째 딸 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떠돌다가 믿기지 않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집을 나간 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딸의 차가 강풍에 비까지 오는 도로를 달리다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를 잃고 운전대를 잡았던 그녀는 스무 살의 나이에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강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내편인줄 알았던 남편은 남이 되었고 친구라 말하던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딸은 몇 년의 힘든 재활치료를 하며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엄마와 언니 오빠의 사랑과 헌신으로 그녀 나이 서른 여섯에 바이올리니스트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유명하거나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바이올린을 들고 엄마를 찾아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을 방문했다. 

 

딸은 할머니에 비해 몸집이 크고 살이 많이 찌긴 했지만 다시 돌아보게 하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의 휠체어가 무대로 오르고 스포트라이트가 그녀를 비추면 모든 시선은 그녀의 미모를 감탄하며 연주를 감상했고 그녀의 다리에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입주민 들의 박수와 환호, 관심을 받을 때, 할머니는 조용히 바이올린을 꺼내주고 연주를 기다리고, 연주가 끝날 때까지 무대 옆 희미한 불빛아래 앉아 딸을 기다리셨다. 연주가 끝나면 물병을 건네주고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은 뒤 바이올린과 딸의 소지품을 챙겨 들고 앞서가는 딸의 휠체어를 따라 퇴장하셨다. 

 

그날도 딸의 연주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조용히 무대 옆을 지키시던 할머니가 연주 도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콧구멍이 커지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무대를 가로질러 방으로 가시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이 있은 몇 달 후 할머니는 롱텀 케어홈으로 옮겨 가셨다. 할머니는 떠나 신지 한 달도 안되어 스포트라이트 한번 받지 못한 당신의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우리 빌딩 안에도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세우고 촛불을 밝혀 놓았다. 바람이 불고 난 뒤에서야 당신 품에 안을 수 있었던 딸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나버린 남편 몫까지 감당하며 세상의 칼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살다 가신 할머니는 평온해 보였다. 조명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던 할머니는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주인공이었던 적도 없어, 언제나 엑스트라였지" 하셨지만 할머니는 위대한 파수꾼이었고 주인공이었다.  행인1, 행인2, 상인, 군중, 주인공보다 튀어서는 안되고 존재감을 드러내어서도 안 되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배역보다 빛나던….

 

오랜 서울살이를 끝내고 귀농했다는 친구가 보낸 동영상 속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속에서 말없이 씨앗을 뿌리는 친구의 모습이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함께 넘실대고 있었다. 잡풀을 뽑아내고 씨앗을 뿌리는 친구 뒤로 바람이 불고, 허연 비닐봉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위선자들이라 호통치시던 수잔 할머니 넋두리가 영화 속 자막처럼 비닐 봉지를 따라 천천히 날아 올랐다.“바람이 불면 알게 되지, 알곡인지 쭉정인지, 암, 바람이 불면 알 수 있고말고."

 

*파수꾼: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 또는 어떤 일을 한눈 팔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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