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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서쪽으로 난 창] 남편의 거짓말 (스물여덟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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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3-20 08:09 조회2,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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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아직은 바람이 차건만 햇빛을 따라 나가신 할머니 쥴스가 테라스 벤치에 앉아 졸고 계셨다. 졸고 계신 할머니의 은빛 머리를 따뜻한 봄 햇살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유리문을 열고 다가가 흘러내린 보라색 담요를 어깨위로 살그머니 끌어 올렸다.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로 “레이첼, 너 구나?” 하셨다. “죄송해요,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자, 초점 없는 회색 눈동자가 창을 열 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도 쉬지 않고 다가갔는데 할머니를 깨우고 말았다. 할머니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나를 보신 걸까? 보지도 듣지도 않고 알아차리는 능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할머니는 빛과 어둠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물체와 공간을 구별하는 정도의 시력만 남은 87세의 시각 장애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장애는 아니고 시신경에 염증이 생긴 칠 팔 년 전부터 한걸음 한걸음 찾아온 불청객이다. 매일 근처에 사는 딸이 와서 점심과 저녁 수발을 들고 돌아간다. 가끔 딸이 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에도 일상 생활에 별 불편함을 못 느끼신다. 혼자 다이닝룸에 나와 식사도 잘 하시고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신다. 도우미나 간호사들의 도움이 없어도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피는 꽃처럼 조용조용 옮겨 다니신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용하시던 지팡이를 네비게이션 삼아 어디든지 가 실수 있다.

 

이왕 할머니를 깨우고 만 내가 “어떻게 저 인줄 아셨어요?” 했다. 할머니는 “냄새”라며 단어 하나로 답하셨다. 순간 내 머리위로 뜨거운 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전날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과 마늘, 김치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시 뻘개진 내 얼굴까지 냄새를 맡았는지 서둘러 냄새의 정체를 밝히셨다. “너에게서 꽃 향기가 나, 라벤더” 하시며 내 머릿속의 마늘냄새를 말끔하게 털어 주셨다.

 

내가 일하는 리타이어먼트 홈에서는 입주자 든 직원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향수 알러지와 호흡기가 약한 노인들의 건강을 위한 배려로 자율에 맡긴 규정이다. 나도 향수 애호가였지만 입사를 할 즈음 아로마 테라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향수는 년 중 행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향수대신 기분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레몬, 로즈우드, 사이프러스, 라벤더 등을 손목이나 귀 뒤에 살짝 바른다. 주로 라벤더를 사용하는데 향수처럼 진하지도 않고 금세 날아가버리는 특성 때문에 걱정 없이 바르고 다녔다. 그런데 소량이지만 매일 사용하고 디퓨저를 이용해 라벤더 향을 집안에 채우는 날이 많다 보니 향기가 내 몸에 베인 거였다.

 

보지 못해도 듣지 않고도 향으로 나를 알아보신 할머니 쥴스는 요리사였다. 어릴 때부터 미각과 후각이 뛰어나 다른 사람이 맡지 못하는 미세한 냄새까지 맡았다. 5남매중 유일한 딸이었던 쥴스는 엄마를 도와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요리를 직업으로 택했다. 쥴스의 음식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 또한 행복했다. 가족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할머니보다 할머니의 요리를 떠올리고 그리워한다. 여러 가지 요리 중에서도 작게 썬 닭고기에 당근 감자 완두콩을 넣고 만든 치킨 파이는 많은 이들이 감탄을 아끼지 않던 요리였다. 

 

오빠 친구였던 게리도 쥴스의 치킨 파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게리는 갖가지 음식 재료와 향료냄새가 뒤섞인 별로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신경 쓰이던 스물 두 살 쥴스에게 “너에게서 나는 이 향기로운 냄새를 매일 맡게 해 줄래?” 하는 말로 청혼을 했다. 그 어떤 말보다 로맨틱했다는 쥴스가 “네가 원하면 치킨 파이를 평생토록 먹게 해 줄게” 했다. 특별하고 거창한 청혼 이벤트도 자랑할 다이아 반지도 없었지만 살면서 서로의 보석이 되고 이벤트가 된 부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57년을 맛깔 나게 사셨다.

 

늦은 밤까지 식당 일을 하고 집으로 가면 생선냄새 양파냄새 갖가지 소스냄새가 귀속까지 베인 그녀를 안고 “음, 오늘은 사과와 로즈메리향이 섞였군” 이라며 달콤한 거짓말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던 남편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들어도 매일 듣고 싶던 향기로운 거짓말쟁이 남편 게리를 잃은 칠 팔 년 전부터 조금씩 시력까지 잃으셨다.

 

보지 못하는 세상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냄새로 바라보는 세상도 여전히 아름다워”하셨다. 더러는 눈뜨고는 못 볼 더러운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니 고마울 때도 있다 하신다. 할머니는 입주하실 때 할아버지가 쓰시던 반쯤 남은 스킨로션, 가방, 모자, 돋보기, 그리고 손때 묻은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오셨는데 할아버지가 그리우실 때면 할머니는 로션 병뚜껑을 열어 할아버지를 만나신다. 쓰시던 물건에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아직 늙지 않은 후각에 기뻐하시고 잃은 시각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향기로 남은 기억 속에서 할머니께서는 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신다.

 

둘째 딸을 낳고 어렵게 마련한 집 정원은 온통 라벤더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심은 꽃이었다. 보라색 향기로운 라벤더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었지만 벌레들은 싫어하는 향이니 라벤더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부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끊임없이 피고 지는 라벤더꽃과 잎을 따서 차로 마셨다. 늦가을이 되면 꽃이 지면서 남긴 꽃씨를 말려 집안 곳곳에 걸어 방향제로 사용하셨다. 향기로 채운 집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꽃씨 같은 아들 딸 오 남매를 선물한 남편은 라벤더같은 남자였다. 피어 있는 동안엔 꽃으로, 지고 난 뒤엔 향기로 남은 라벤더…

 

할아버지가 쓰시던 지팡이를 짚고 할아버지의 체취와 함께 향기를 따라 살아가시는 할머니가 “넌 무슨 향을 좋아해?” 하셨다. 엉겁결에 받은 질문에 “라벤더도 좋고 장미도 좋고……”하며 무슨 향을 제일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자신 없는 대답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라벤더, 장미, 라일락, 갖가지 꽃 향에 과일 향, 산을 오를 때 따라 오던 솔 내음과 풀 냄새, 커피 향을 비롯 수많은 향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 뭔 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은 꽃 향도 과일이나 커피향도 아닌 ‘빵 향기’라는 걸 알게 된 건 며칠 전의 일이다. 

 

세계 각국의 음식과 빵 떡 할 것 없이 요리하는걸 좋아하고 솜씨도 좋은 둘째 언니가 연두색 완두콩을 넣고 찐 막걸리빵 사진을 보내왔다. 순간 막걸리빵 특유의 냄새가 후끈 풍겨왔다. 그 빵을 먹었던 게 언제였나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 뜨거운 김과 함께 물씬 풍겨오던 빵 냄새는 울 엄마 냄새였다. 어릴 적 울 엄마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 먹거리로 빨간 강낭콩을 듬성듬성 넣은 막걸리 빵을 자주 쪄 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커다란 솥 안에 먹음직스럽게 부풀어오른 빵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는”배고프지?”하며 뜨거운 면 보에 쌓인 빵을 꺼내 찬물에 손을 식혀가며 잘라 주셨다. 물부터 마시라는 걱정도 뒤로 하고 한입 크게 베어 무는 나를 바라보시던 엄마는 빵보다 더 푸근한 미소를 귀 뒤에 걸고 계셨다.

 

아침이면 화장대 앞에 앉아 아껴 쓰시던 엄마의 코티 분 향기도 그립지만 엄마보다 먼저 달려와 나를 반기던 빵 냄새는, 마음이 고플 때 내 영혼을 채우는 향수다. 향기는 기억을 부르고 기억 속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 다독이는 울 엄마 목소리다. 그래서 나는 빵 냄새를 빵 향기라 부른다.

 

이처럼 추억을 부르는가 하면 식욕까지 불러 일으키는 것은 향기가 가진 힘이다. 그런 향기의 힘을 사려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각국의 조향사 들은 끊임없이 향수를 제조하고 우리는 그들이 만든 향기를 돈으로 산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 향수의 목적이니 “저 향을 입으면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 향수를 뿌리면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적잖은 돈을 지불하고 라도 집어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로도 제작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 그루누이가 살인까지 해가며 향수제조에 광적인 집착을 했던 이유도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스물 다섯 명의 생명을 빼앗아 만든 향수를 자신의 몸에 부은 살인자 그루누이가 사형장에 나타나자 뿌린 향수에 취한 수백 명의 군중은 그를 천사라 추앙하며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향수 한 방울이면 이 세상 전부를 지배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힘을 제조한 것이다. 그 향기에 취해 자신을 향해 경배하는 군중을 바라보던 그루누이는 가장 먼저 죽인 여자를 떠 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에게조차 버림받고 단 한번도 사랑 받아 본적 없는 그가 원한 건 결국 사랑이었다. 자신이 뿌린 향수 때문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본 모습 그대로 사랑 받고 싶었던 것이다. 입맛 까다로운 입술이 당긴 화살이 날아올 때 튼튼한 방패가 되어준 건 할아버지 게리의 사과 향 가득한 사랑이었고, 물부터 마시라는 걱정은 세상이 시비를 걸어올 때도 주눅들지 않는 자식들로 키우신 울 엄마의 사랑이었다. 

 

일요일 오후, 밀가루에 설탕 소금 계란 막걸리를 넣고 반죽을 했다. 잘 부풀어 오른 반죽 위에 삶아둔 빨간 강낭콩을 톡톡 던져 올리고 가스 불을 켰다.  빵 반죽을 넣은 냄비에 뜨거운 김이 오르자 온 집안에 막걸리빵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각자의 방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이게 무슨 냄새지?” “처음 맡아보는 빵 냄샌데요?” “냄새 좋다" 하며 부엌으로 모여 들었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 꼬리를 끌어 내리며 큼지막하게 자른 빵 바구니를 자랑스레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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