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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 문학] 처음 하는 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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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10-20 08:03 조회7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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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재수 없는 녀석!’

생각만 해도 거들먹거리는 표정이 떠올라 기분이 상했다. 녀석은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재벌 손자라는 말도 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해서 내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나는 5학년 반장 선거에서 녀석보다 한 표 차이로 반장이 되었다. 내게 밀려 부반장이 된 녀석은 반장이라도 된 듯이 아이들에게 햄버거와 선물을 돌렸다. 나는 엄마 혼자 벌기 때문에 반장 턱도 못 내고 속을 끓여야 했다. 게다가 녀석은 지가 반장인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날 계속 무시했다.

“재화 녀석, 거만하게 굴어서 기분 나빠. 자기가 반장인 줄 안다니까. 재화 옆에 붙어 아양 떠는 애들도 얄미워.”

나는 5학년 대표기자인 단짝 찬이한테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빈아, 아무리 그래도 반장은 너야. 자신감을 가져! 개표 때 너와 표가 같아서 네가 반장 양보했잖아. 그때 녀석이 재투표하자고 고집부리다가 지니까, 까칠하게 대하는지도 모르지.”

찬이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도 처음 맡은 반장이 힘에 부쳤다.

그날도 반장처럼 행동하는 재화 때문에 쉬는 시간에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3교시가 끝나고 선생님이 교실을 잠깐 비웠다.

재화는 그 틈을 타서 중대 발표라도 하듯이 책상 위에 올라섰다.

“애들아! 이번 토요일이 나, 서재화 생일이다. 우리 반 모두 초대한다. 맥도날드 플레이 하우스에서 한턱 쏠게.”

“와! 축하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며 함성을 질렀다. 이번에는 재화가 성큼성큼 내게로 왔다. 그리고 내 책상에 걸터앉더니 염장을 질러댔다.

“너는 당연히 와야지. 안 그러냐? 너 플레이 하우스 가봤니?”

못 들은 척,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초대하려면 정중하게 해야지,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야, 서재화! 엉덩이를 어디다 붙이냐?”

찬이가 화장실 다녀오다가 보고 소리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대화중이라고. 기자라면 보는 눈이 있어야지, 그래 가지고 기자를 하겠냐?”

재화가 빈정댔다.

“내 눈 걱정하지 말고 책상에서 엉덩이나 떼라.”

찬이가 재화에게 다가섰다.

“웬 참견인데?”

재화 패거리 몇 명이 거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찬이 말이 맞아. 내 책상에서 좀 비켜줄래?”

나는 참던 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쭈, 둘이 합세해서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재화와 패거리들이 나와 찬이를 보며 윽박질렀다.

“안 되겠네. 어서 내려오지 못해!”

찬이가 재화를 내 책상에서 끌어 내렸다.

“어어! 왜 그래?”

재화가 책상과 함께 교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어떡해? 괜찮니?”

재화 패거리들이 당황했다.

정작 재화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닥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다. 패거리들이 제화를 일으키려고 했다.

“저리 비켜!”

재화가 코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알렸는지, 선생님이 교실로 왔다. 선생님은 서둘러 코피가 나지 않게 조치를 했다.

“채찬! 지금 상황이 뭐냐? 싸운 거니?”

“싸운 거 아닌데요. 저 녀석이….”

찬이는 코에 솜을 끼우고 있는 재화를 보며 말했다.

“재화 코피 나게 한 거, 너희 둘이잖아.”

재화 패거리들이 고자질을 했다.

“반장까지? 안되겠다! 수업 끝나고 셋이 교무실로 와!”

일이 커지고 있었다. 찬이를 돌아보았다. 찬이도 당황스러운지 어깨를 추어올렸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했다.

“사실대로 말씀 드려서 녀석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겠어.”

찬이가 앞서 교무실로 들어갔다. 재화는 보이지 않았다.

“반장은 학급 일에 모범을 보여야지, 일을 만들면 어쩌냐? 그리고 찬이 너 패싸움 기사 쓰고 싶어 그랬냐?”

선생님이 찬이에게 꿀밤을 한 대 주며 말했다.

“찬이는 자, 잘 못 한 게 없어요,”

내가 말을 더듬거리자, 찬이가 나섰다.

“선생님,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재화 녀석 말예요.”

찬이가 기자답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넘어지게 하고 코피까지 나게 하면 안 되지. 다음부터 조심해라. 알았지?”

단단히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집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곧장 찬이네 아파트 농구대로 달려갔다. 농구는 찬이와 내가 최고 기분 좋은 날 하는 놀이 중 하나다. 농구대로 가는 지름길은 아파트 단지 내 인공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너야했다. 우리는 신나게 농구공을 주고받으며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재화가 징검다리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다.

“어? 재화다. 어째 혼자네.”

찬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도 의아하기는 마차가지였다. 항상 몇 명을 달고 다니는 모습에 익숙한 터였다.

우리를 본 재화가 오던 길을 돌아섰다.

“서재화! 교무실에 오라는 말 잊었어?”

찬이가 한마디 했다.

“신경 꺼라.”

역시나 말이 곱지 않았다. 나는 반장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우리랑 농구 할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재화가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공교롭게도 나와 몸이 부딪혀 휘청거렸다.

“어어어!”

재화를 잡으려다가 같이 물에 빠졌다. 아직 물은 차가웠다. 찬이가 재화한테 손을 내밀었다.

“됐어!”

재화는 찬이의 호의를 뿌리치고 물에서 나왔다. 바지는 오줌 싼 것처럼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짜식,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찬이가 멀어지는 재화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친구부터 손잡아 줘야지. 뭐가 좋다고 그 녀석에게 손을 내미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날 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미열까지 나서 잠을 설치다가 일어났다. 학교에 가니 재화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재화가 밤새 열이 높아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쯧쯧, 물에 빠졌다고 입원까지 하냐? 온실 안에서 자란 게 맞나 봐.”

찬이가 혀를 찼다. 나는 밤새 감기 기운에 시달렸던 게 떠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반장이라는 이유로 찬이랑 병문안을 갔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던 풍경처럼 웬 아저씨 둘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기다리라는 말에 우리는 병실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약해서 어디에 쓰려고? 큰일을 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

“싫어요! 난 할아버지 회사 물려받지 않을 거예요. 내게 필요한 건 회사가 아니라 친구라고요! 잘 산다고 따르는 애들 말고 진짜 친구 말예요.”

재화의 목소리가 튕겨 나왔다.

‘짜식! 철 드나 보네.’

찬이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유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어서 나아라. 쯧쯧….”

병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재화 반 친구인데, 병문안 왔어요.”

찬이가 넙죽 인사를 했다.

“오냐, 들어가 봐라.”

할아버지가 위엄 있는 얼굴로 말했다. 재화는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좀 어떠냐?”

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찬이가 다가가서 재화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고, 엄살이지?”

재화는 찬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넌 괜찮아? 그리고 찬이 너! 진단서 안 끊어 온 걸 다행으로 여겨.”

재화가 얼굴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책상을 안고 넘어지면서 이마도 긁힌 것 같았다.

“그래, 고마워서 눈물 나려고 한다.”

찬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 오늘은 용기를 냈다.

“친구 필요하다며? 우리가 친구해 줄 테니 어서 나아.”

“들었냐?”

“그래.”

찬이가 재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재화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어제 미안했어. 내가 좀 시건방졌지? 지면 안 된다는 엄한 할아버지 말이 늘 부담되었는데, 이젠 편안하게 생각하려고 해.”

재화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그러나 재화의 행동은 그 날 이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재화 때문에 기분 상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재화의 말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얘들아, 오늘 재화 생일인 거 알지? 우리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 우리는 친구잖아.”

나도 반장답게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새, 처음 하는 반장이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출처: 2021년 아동문예 5.6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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