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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초로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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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10-25 00:40 조회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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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여인


   상봉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잠시 후 내 옆에 초로의 여인이 와 섰다. 베이지 색 빵모자에 밤색코트를 입은 단아한 모습이다. 분홍색이 어리는 안경 너머로 눈 밑에 주름들이 보인다. 칠십은 되 보이는 멋쟁이 할머니다. 

   내 앞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서 나는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두 세번 계속 사양하더니 내 강권에 못이기는 듯 다소곳이 앉았다. 목에 감은 화사한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바둑판 문양의 작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약간 숙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조용히 앉아 있다. 아무리 보아도 지하철에서는 만나기 힘든 우아하게 나이 든 멋쟁이라고 여겨졌다.  나이 든 사람의 멋스러움은  젊은이에 비해 연륜만큼은 깊이를 느끼게  한다. 

   옆 좌석에는 퉁퉁한 젊은 여자가 고개를 젖히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고 있어 너무 비교가 되었다. 자리를 양보한 내게 미안해할 것 같아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다른 곳을 보았다. 얼마 뒤 옆 좌석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났다.  초로의 여인이 내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지만 냉큼 앉기도 그래서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사람이 얼른 와서 앉았다. 순간 낭패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나 역시 마스크 위에 눈을 크게 떠서 당혹함을 표했다.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마 뒤 그 자리가 또 비었다. 여인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앉지 못하게 손으로 좌석을 가린 채 내게 앉기를 권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정중하게 내게 말했다

   “저 때문에 오래 서 계셨지요“

   내가 약간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니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

   나란히 앉아서 마음 속으로 앞만 보면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침묵을 깨고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디까지 가는지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참 미인이시네요’하고 말을 건넨다면 그건 분명 희롱이다. 그녀가 내 발등을 밟아 아프기 전까지는 결국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차는 어둠 속을 신나게 달려갔다. 나는 뒤를 돌아볼 염두도 내지 못한 채 친구와 약속한 강남구청역에서 서둘러 내렸다. 돌아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스치는 인연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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