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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문학] 『천진 시절』이라는 이름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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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보배아이(김진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2-15 09:31 조회1,0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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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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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배아이(김진아)

(사)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국의 방송은 VHS 비디오를 빌려서 보았는데(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넷플릭스나 애플 TV 등을 통해서 캐나다의 안방에서 얼마든지 한국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 화제의 한국 영화도 종종 동네 극장에서 상영할 때면 일부러 찾아가 보는 편이다(가보면 관객이 너무 없어 영화관이 썰렁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는데 나에게는 한국 책이다. 한국 책을 읽고 싶을 때면 과연 내가 타향에서 살고 있구나 실감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한인이 밀집해 사는 동네인 코퀴틀람, 써리 도서관에 가보면 한국 책이 서가로 하나 정도는 가득 꽂혀 있다(한 달에 두 권을 구매 신청할 수 있다). 어느 날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 같은 새 책이 눈에 띄었다. 『천진 시절』이라는 제목의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양장본의 신간이었다. 이 코로나 시대에, 그 누가 신청해 주문해 놓았을까? 도서를 신청해주신 불면식의 한국 분에게 감사하는 인사를 허공에 올렸다. 이 글은 소설 『천진 시절』독후감으로, 나의 캐나다 이민살이를 오버랩해서 써 본 것이다. 


 


『천진 시절』에는 중국 “천진시”를 배경으로 네 명의 젊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젊은 “상아”는 20년 전 고향을 떠나왔다. 천진시는 한때 정착했던 곳이었고, 상아와 함께 고향을 떠난 특이한 이름의 주인공 "무군", 그리고 천진에서 같은 직장 생활을 했던 동료 "정숙", 정숙의 연인이었던 "희철"의 이야기이다. 상아가 과거에 알았던 정숙을 20년 만에 만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이 소설의 중심 줄거리이다.  


 


        "첫 10년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경력을 쌓기에 급급했고 Z시에 정착한 다음의 10년은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중년의 주부로 변신하느라, 서서히 늙어가느라 별 여유 없이 살았다…. 비행기가 농밀한 안개 같은 구름 속을 지날 때, 나는 문득 20년 전의 천진행 기차 안을 생각했다. 한기가 매섭던 초봄, 아직 성에가 조금 남아 있는 창문, 한적한 겨울 들판과 뼈만 남은 하얀 나무들, 잿빛의 마른 눈이 쌓인 강바닥이 스쳐 지날 때가 있었고…"(14~15면)


 


『천진 시절』이라 제목에도 등장하는 "천진"과는 대조적으로 주인공 상아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을 "제트시"라고 말한다. 정확한 이름은 거론하지 않는다. “독박 육아”를 하소연하며 최근 생활은 "별 여유 없이 사는 삶"으로 일갈한다. 반면에 20년 전 천진행 기차를 탔던 그날의 풍경만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천진"이라는 곳은 상아의 인생에서 특별한 장소였다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나도 주인공처럼 한국 땅을 떠난 날을 기억한다. 운전면허 시험을 연거푸 떨어지는 바람에 비행 일정을 두 번이나 연기하면서 과연 이 땅을 떠날 수 있을까 조마조마 가슴 졸여야 했다. 떠날 날짜를 받아놓고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터졌고 출애굽기를 불사하듯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바라보았던 그날의 하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한국 땅이 멀어지는 것을 자꾸 내려다보면서 '이제 언제 여기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운하고, 서러웠던 그 느낌이 잊히지 않는다.


 


        "조도가 낮은 푸른색 일광등 빛 아래서 정숙이 몸을 사리고 앉은 비닐하우스는 어두운 바다 위를 홀로 떠도는 섬, 또는 거대한 자궁 속에서 할딱거리고 있는 미약한 살덩어리 같았다… 뻥 뚫린 공간에 도드라지게 앉아 있는 정숙의 모습은 때로 무대 위에서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연극배우 같기도 했다… 전형적인 현대 노동자의 무언극이었다."(113면)


 


상아에게 "천진 시절"은 연극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상아는 연극 속에서 연기했던 스스로를 '관객'으로서 관찰하고 있다. 어떤 자서전을 읽어보면 자신의 인생을 막과 장으로 나누어 소개하는 것을 본다. 지나온 인생을 연극 무대로 비유할 만하다.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나의 무대에서 타인은 조연이고, 타인의 무대에서 나는 조연이다. 인생사가 잔잔했다면 담담한 독립영화 장르가 될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스펙타클한 액션 장르일 것이다. 나의 연극이라고 해서 진정 내가 주연이었을까 물어본다면, 글쎄… 적잖은 막과 장에서 주인공의 대사를 제대로 읊지 못해 조연의 감초 연기에 파묻힐 때가 많았다. 나의 자신감 없으므로 인해 대사는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연극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분명하게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다시 한번만 더 똑같은 연극에 출연할 수 있다면 그때보다는 나은 연기를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한국을 떠나온 지 어언 16년, 나는 한동안 향수에 시달렸다. 문득문득 여고 시절이 떠올랐고, 신문사 마감 날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직장 생활도 그리웠다. 그러다 어떤 하루는 내 어렸을 적, 아침마다 출근하려고 화장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울 앞에서 한쪽 눈썹을 높이 치켜올려 한 번에 휙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눈썹 산을 그리던 엄마를 한참 지켜보던 나를 떠올렸다. 숙련된 동작으로 실수 없이 아이라인과 입술을 그려낸 후 붉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터트리며 나던 소리, 눈을 크게 뜨고 표정만으로 "오늘도 힘내자!" 다짐하는 엄마의 얼굴이 생생했다. 이제는 화장도 안 하시고, 출근도 안 하시기에 더 이상 엄마의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어도, 그 시절 거울 속 젊고 활기찼던 엄마의 얼굴은 내 기억 속 특별한 방에 저장되어 있었다. 주인공 상아는 "천진 시절"의 장면들을 대본의 섬세한 지문처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엄마의 화장하는 모습을 빈틈없이 뜯어 보고, 꼼꼼히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억 속 젊은 엄마를 마치 연극배우처럼 여기고 있어서가 아닌가. 아아.. 정말 그 시절의 엄마는 매일매일을 화장으로 시작하셨고, 하루하루를 공연하듯 살아내셨다. 일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던 모습 역시, 내게는 공연이 끝난 무대 뒤, 거울 앞에 앉은 여배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 옛날 엄마 나이가 되었고,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엄마를 추억하고 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라 내가 들고 온 지저분한 도시락의 뚜껑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4학년 2반 김상아'라고 쓰여 있어야 할 자리에 왜 '5학년 1반 무군'이 있는거야?"(43면)


 


도시락 뒤죽박죽 사건은 이미 두 사람이 운명이라는 공식이고, 두 사람 인연이 일찌감치 어렸을 적부터 이어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무척이나 중요한 장면이다. 이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도시락 뚜껑에 적힌 “무군”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참으로 어색한 이름이다.  왜 무군의 이름은 '아.무.개'가 아니고 '무군'일까? 상아는 무군에게 "무군! 이리 와봐!”, “무군! 나 좀 도와줘!" 식으로 불렀음 직하다. 남자아이 이름 뒤에 '군'을 붙여 부르지 않나. 상아는 애정을 섞은 별명처럼 '무군'의 이름 두 자를 사용했을 것 같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가장 코어라 할 수 있는 인물의 이름을 이름이 없는 이름인 '무군'으로 만들어서 독자를 의아하고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위에 도시락 장면을 제외하고도 상아와 무군의 이름만을 소재로 여러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점을 실마리로 추리해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이름이 "선녀와 나무꾼"을 연상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상아(嫦娥)라는 이름은 '월궁선녀 상아' 즉, '달 속에 있는 선녀'를 뜻하고, 나무꾼에서 한 글자만 빼면 바로 '무군'이다. 무군의 이름을 '아무개'가 아닌 이름 '무군'으로 만든 금희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레알(real) 간파한 것인가! 게다가 무군 곁을 떠나는 상아는 나무꾼을 떠나는 선녀와 다르지 않다. "천진 시절"을 두 글자로 줄이면 "무군"이 된다.


 


한국의 옛날 이야기인 '선녀와 나무꾼'은 사실 심심찮게 내 인생을 대입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선녀이고, 남편이 나무꾼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너무 멀리 날아와 살고 있는 내 처지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라서다. 선녀와 나무꾼은 너무 다른 세계의 두 존재가 결혼을 통해 잠시 행복한 것 같지만, 선녀는 지속해서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나무꾼은 아이 넷을 낳기 전까지는 날개옷을 주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그만 날개옷을 선녀에게 내주는 바람에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잽싸게 하늘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이 둘은 양팔에 하나씩 안고, 아이 하나는 다리 사이에 끼우고.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아이 셋을 데리고 승천하는 이 일러스트는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민 온 이 땅에서 아이 넷을 낳은 그 날, 내 스스로에게 뱉은 독백이 있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긴 글렀구나." 아이 넷을 데리고 한국에 다녀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화 속 선녀가 나무꾼과 한동안은 오순도순 행복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그녀의 한 귀퉁이 마음 속 본향을 향한 그리움을 나는 이해한다.


 


내가 한국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그리움을 경험했을 리 없다.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에 나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꼬박꼬박 야무지게 기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힘든 날일수록 그 밤에 일기장을 펴서 감정의 파편들을 쏟아내곤 했다. 글로 분노하고, 안팎으로 울기도 하면서, 문장을 적어 나를 달랬다. 소설가 금희는 조선족 작가다. 조선족 삶에 대해서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인이다. 당연히 말은 중국말을 하되 한국말은 모국어일 테다. 사상적으로는 북한 사람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다 어른이 되어 캐나다 땅에 옮겨와 살고 있으나, 나의 아이들은 여기서 나고 자랐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한국어로 말해도 생각은 영어가 편하다. 작가가 중국 땅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면서 한글로 적은 이 소설은 왠지 마음이 짠하다. 나는 한글학교 교사를 지원하기까지 해서 우리 아이들을 한글 학교에 보내고 있다. 과연 우리집 아이들이 한글을 배워서, 그리고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한글의 얼과 정서로 써내려갈 수 있을런지는 의구심이 든다.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 반 아이들에게 한글 일기를 쓰라고 권한다. 비록 더듬거려도 한글로 적은 일기와 영어로 써내려간 일기는 서려있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한글 정서를 아이들이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 힘을 조금 알게 되었다. 기억이란 희미해서 머릿속에 놔두기만 하면 점점 더 흐려지기만 하지만 기억의 단상들을 꺼내 글로 쓰고, 다듬으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 글이 마치 연극의 지문처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글로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습작이 계속되면 어느덧 희미했던 기억은 연극처럼 각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이야기도 막과 장으로 재탄생하여 한 편의 연극이 될 수 있다. 아픈 기억이라면 더욱 이 작업을 해 볼 만하다. '기억의 습작'이란 종국에는 아름답게 채색되는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writingmyparentslif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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