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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문학] 세기말 기로棄老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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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선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01 07:57 조회6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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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영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1.


아버지는 어느 날, 티비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부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어머니는, 아버지가 티비가 되었다는 것도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어쩌지 저쩌지, 허둥대다가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본가를 찾은 큰아들 내외, “아버지가 빌려주기로 했던 돈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저들끼리 수군거렸고, 어머니는 큰아들이 장가간 뒤 처음으로 등짝을 후려치며, 


- 티비가 아직 켜져 있는데, 굳이 그 앞에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야 되겠니? 


어이구, 아들은 장가가면 남이라더니, 어머니는 혀를 차며 귀가 전인 큰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시간 쯤 뒤, 그녀가 얼근하게 취해서 집에 돌아와서는, “다음 달에 잡아놓은 상견례는 어떻게 할 거냐”며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큰딸의 등짝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 급하게 외국으로 출장 가셨다고 둘러대면 되지 않겠니? 


언젠가부터 밤낮이 바뀌어버린 고시생 막둥이는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는데, 거실 한 구석ㅡ이라고,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이 볼 때는 막둥이 방문에 너무 가까운 자리ㅡ에서 부산하게 털을 핥고 있던 고양이의 꼬리를 콱 밟고 말았다. 한껏 몰입해 있던 찰나에 난데없이 꼬리 밟힌 고양이가 튀어 오르고, 티비는 기우뚱, 하다가 이내 바닥으로 엎어지면서 모니터가 박살났다. 어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 얘, 어서 응급실로! 아니, 아니지... 얘, 지금 시간에 열린 전파사가 있으려나?


삼남매는 마지못해 티비를 얇은 담요로 둘둘 감아들고 아파트를 나섰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경비 아저씨 왈, 그건 저기다가 두시면 돼요. 아저씨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던 삼남매의 시선에 와 박힌 여덟 글자: <폐가전제품 수거함>.


삼남매는 미적거리며 티비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로의 얼굴도 보지 않고, 휑하니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뺑소니범들처럼.


2. 


어머니가 어느 날, 라디오가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사라지던 날 아침, 어머니 즐겨 앉던 창가 자리에 처음 보는 라디오가 놓여있었다.


와, 라디오, 오랜만이네. 막둥이는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다.


주말인 오늘, 저녁 무렵부터 내일 오전까지 진눈깨비가 내리겠습니다, 외출하실 때 옷 든든히 입으시고, 우산 챙기는 것 기억하셔야겠습니다. 젖은 우산을 담을 비닐봉지 하나, 같이 챙기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는, 우리 후손을 위해 우리 환경을 깨끗하게 지켜가는 일 아닐까요? 쓰레기 분리수거는 단순히 귀찮은 집안일 중 하나가 아니랍니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는, 우리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 양 자체를 줄일 수 있는 것이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음식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버리더라고요. 먹는 거 버리면 나중에 지옥 간다는 말도 한번쯤 들어보셨죠? 빵이나 과일 같은 건 곰팡이 조금 슬었다고 해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집안일이라는 게, 열심히 하는 건 티가 안 나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바로 티가 나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리빙포인트>. 움직일 때마다 주변을 정리하라! 어차피 움직이는 김에, 옆에 어질러진 물건 잠깐 치우고, 지나는 길에 보이는 쓰레기 버리고. 이것만으로도 집안이 말끔해질 수 있어요, 크게 힘 들이지 않고도요.


어머니가 종종,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 자주, 하던 말들이다. 어, 엄마? 마치 막둥이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때맞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멘트: 네, 오늘 방송은 음악으로 시작합니다, <Mother of Mine>. 전주가 시작되려는 찰나, 막둥이는 라디오를 껐다.


막둥이는 맏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맏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막둥이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세 시간 후 답 문자가 왔다.


- 폐가전제품 수거함, 어딘지 알잖아.


막둥이는 둘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째는 전화를 받고 한 달음에 달려왔다. 둘째는 라디오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눈물이 좀 잦아들자 둘째 왈,


- 대체 이걸 시댁 식구들한테 뭐라고 설명하느냔 말이야!


둘째를 잘 달래서 돌려보낸 후, 막둥이는 라디오를 처음 발견했던 창가 자리에 놓고, 하루종일 켜두었다. 화무십일홍이라. 라디오를 켜둔 지 열흘 째 되던 날, 막둥이는 다시 한 번 라디오를 껐다. 그리고 어머니의 옷장을 뒤져서, 어머니가 특별한 날에만 꺼내 입던 검은색 비로도 스커트를 찾았다.


라디오는 이내 비로도 스커트에 둘둘 말린 채 <폐가전제품 수거함> 속에 안치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 외의 방법을, 막둥이는 알지 못했다. 막둥이는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지직 지지직, 귓전에 맴도는 라디오의 마지막 잡음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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