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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구스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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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6-14 11:23 조회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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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r Lake photo by hanhim


오늘의 한힘 단상 2023년 6월 14일


구스와 나

 

   다리 통증이 생기고 난 뒤로는 디어 레이크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반쯤 되는 거리에 쉐볼트 센타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조용한 카페가 있다. 멀리 호수가 아련하게 보이고 파란 잔디밭이 넓게 퍼져있어 눈이 시원하다. 햇살이 잔디 위에 쏟아지고 따사로움이 유월의 한 낮을 감싸고 있다. 

 

   거위만큼 큼지막한 캐나다 구스들이 한가롭게 잔디밭 위에서 풀을 뜯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끼들을 대 여섯 마리씩 거느리고 다녀야 하는데 웬일인지 새끼들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구스는 철새가 되어 봄에 새끼를 키워서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 때쯤 되면 남쪽으로 날아갔다가 다음 해에 다시 날아오는 새다. 날씨 변화가 생기고 도시 근방에 먹이가 풍부하다보니 멀리 날아가는 일을 그만 둔 구스들이 텃새가 되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구스들은 하루 종일 풀을 뜯는다. 풀 뜯다 지치면 더러 긴 목을 등위에 올리고 낮잠을 잔다. 도무지 사는데 고민할 게 없는 삶이다. 매일 종일 풀을 뜯고 때가 되면 서로 사랑을 나누고 교대로 알을 품다가 새끼가 태어나면 함께 풀을 뜯으러 다닌다. 새끼라고 해서 어미가 풀을 뜯어 먹여주지는 않는다. 어린 새끼 때부터 스스로 풀을 뜯어야 한다. 풀이라고 아무 풀이나 뜯는 게 아니고 어린 풀을 골라가며 뜯는다.

 

    풀을 뜯고 있는 구스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 사는 삶이다. 고통은 없고 평온함만 있다면 살만한 삶이 아닐까?

    누군가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듯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평화로운 구스의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나는 기꺼이 인간의 삶을 택하겠다.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온갖 고통을 맛보지 않고, 평생을 풀만 뜯는 구스의 삶은 무의미하다. 고통이 있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에 고통이 따라온다. 고통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욕심처럼 하나만을 가질 수 없게 되어있다. 삶을 바라볼 때 태양을 등지고 뒤를 보면 어두운 그림자만 보이듯이 어느 쪽에 중심을 두느냐에 달려 있다. 일견 풀만 뜯고 살아가는 구스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멀리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 잔을 기우리고 있고, 구스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구스에게 풀을 뜯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나는 커피 마시기를 멈추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지만 구스는 풀 뜯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하루 종일 뜯어야만 그 날의 식량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가족과 함께 바닷가를 달려서 호슈베이(Horseshoe Bay)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지만 구스는 여전히 풀을 뜯고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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