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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농로산책(農路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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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숙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7-12 07:27 조회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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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한낮의 무더위도 저녁 해거름이면 누그러진다. 오래간만에 냇 바람이나 쏘이고 싶어 가벼운 산책 길에 나 섰다. 모를 심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논에는 쭈빗 쭈빗 벼 이삭이 올라온다.


초록바다 같은 들판에는 바람이 쓸고 지날 적마다 싱그러운 파도가 일렁인다. 날씨도 순조롭고 병충해 방제도 철저히 해서 올 벼농사는 대풍일거라고 흐뭇해한다. 눈을 주는 고추 밭 이랑마다 모닥불이 타 들 듯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어느 사이 수숫대도 긴 목을 뽑아 들고 술렁이고 있다.


  꼬불꼬불한 농로(農路)에는 소 꼴을 잔뜩 짊어지고 소 꼴뱅이를 쥔 농부들이 서둘러 지나간다. 어미소를 따라 겅중겅중 뛰어가는 송아지이 모습이 천진스럽다. 저 소는 옥이네 누렁인데 엊그제 아침나절 냇가에 매어 놓고 저녁에 데리러 갔더니 새끼를 낳아 핥아주고 있더란다. 보드레한 풀 밭에서 혼자서 해산을 하고 어미소는 냇물을 마시면서 세상을 다 얻은 듯 푸근했을 게다.


  지나가던 마을 아저씨가 지게를 내려 놓는다. 고추 마대가 잔뜩 지어져 있다. “고추농사 잘 지으셨어요?” “풍년이다 마다. 풍이니께 값이 말이 아니여. 지난 장날 한 근에 칠 백원씩 넘기는 걸 보니 매가리가 다 빠진다 이거여. 참 큰일이제. 선생은 글을 써서 신문에도 낸다니께 허는 얘긴데 그 얘기 좀 써 줄 수 없을까. 적선하는 셈 치고 말여.” 언제 왔는지 용이 아버지가 거들었다. “저번에 다 죽어가는 황새도 신문에 한번 나고 살아났다며? 거 보라고 . 아, 우리가 황새만도 못하단 말인가. 이런 형편을 다 쓰면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나는 이럴 때 난감해진다. 흙에 묻혀 조용히 슬면서 유명한 사람이 아닌 것에 만족해 왔는데 오늘은 무명한 내가 한스럽다. 내 무슨 능력 있어 저들의 힘이 되겠는가.


  교직을 떠나 시골에 묻히면서 내가 얼마나 배겨 낼 것인가, 사실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어언 10년을 살다 보니 탯줄 같은 끈끈한 인정이 나를 잡아 맨다. 시속이 변해 시골 사람도 약아빠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아직은 그래도 사람 냄새 나는 이는 시골에 더 많다. 꾸밀 줄 모르는 사람들, 부동산 투기로 떼돈 버는 재주는 없지만 개미처럼 일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 땀 흘린 만큼만 바라고 사는 못나디 못난 착한 사람들. 나는 언제부터 인지 이들의 못남까지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내 닫는다. 거기에도 바리바리 고추가 실려 있다. 온 마을 온 고장이 고추가 주 농산물인데 어쩔거나.


  여름 저녁 서늘한 들바람이 왜 이리도 허허한가. 마을 쪽에서 쑥 내음 모기향이 은은히 코끝을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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