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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문학] 할머니의 콩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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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7-19 09:03 조회5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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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

사)한국문인협회밴쿠버지부회원



“수지야! 저녁 먹자.”

시골의 겨울은 산그늘이 일찍 져서 해가 노루 꼬리보다 더 짧았다. 겨울 방학이라

대여섯 명의 남자아이들 속에 섞여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남자아이들과

노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쟤는 지집아가 선머스마처럼 구슬치기가 다 뭐꼬?”

“엄마, 잠깐만, 이거만 따고 갈게. 에잇, 빗나갔잖아요.”

엄마는 구슬을 던지려는 순간 내 손을 낚아챘다.

“아이고, 가스나 손이 이게 뭐꼬? 골짜기 돌밭 같네.”

밖에서 노느라 거칠어진 손등을 보고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내 손이 이렇게 된 건 엄마 잘못이지. 아빠 따라 서울 갔으면 안 그럴 긴데…….”

놓친 구슬이 아깝기도 하지만, 서울서 온 미례의 희고 뽀얀 손이 떠올라 엄마 탓으

로 돌리며 눈을 흘겼다.

아빠는 공무원이라 3년 전에 서울로 발령 났다. 서울 집값이 비싸 많은 식구가 살

집을 구하기 힘들어 중학생인 언니만 아빠 따라갔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까지 모

두 아홉 명이다.

“치, 나도 서울 가고 싶단 말이에요.”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면 보내 준다고 했다. 집에 남은 식구는 온통 남자들뿐이

다. 한 살 차이 곱슬머리 오빠. 나를 귀찮게 하는 개구쟁이 남동생, 덤으로 사촌 남

동생이 둘이나 있다. 왜 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4학년

씩이나 되었는데도 남자아이들 놀이만 하고 놀았다.

팽이 놀이,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연 놀이, 딱지치기, 제기차기가 내 놀이 목록이

다. 논에 물이 얼면 앉은뱅이 썰매도 신나는 놀이 중 하나다. 송곳으로 얼음을 콕콕

찍어 밀어서 쌩쌩 달리는 썰매의 짜릿한 맛은 시골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놀이다.

나는 호주머니가 해질 정도로 구슬을 넣고 쩔렁거리며 다녔다. 여자아이들 놀이에

는 별 관심도 없다.


얼마 전 서울에서 휠체어를 탄 미례라는 아이가 이사 왔다. 미례는 예쁜 색동 콩주

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미례가 가지고 있는 콩주머니를 보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

이 났다. 할머니는 색동 콩주머니를 늘 만지작거렸다.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 요즈음도 색동 콩주머니가 있네.’

미례는 휠체어에 앉아 콩주머니 공중 돌리기를 하고 놀았다. 앉아서도 참 잘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엄마한테 콩주머니를 사 달라고 졸랐다.

“이제야 우리 수지가 지집아가 되려나 보다. 엄마가 기워 줄 게.”


엄마는 그날 밤 콩주머니를 기웠다. 엄마가 콩주머니를 깁는 동안 엎드려 동화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 수지는 동화 구연가가 되겠어.”

나는 작가가 될 거다. 나에겐 오빠가 읽던 위인전이나 독립운동가, 그리고‘해리포

터’와 같은 책들이 가득하다. 위인전을 두 권씩이나 읽을 때까지 엄마는 콩주머니

를 깁고 있었다.

“엄마, 아직이야? 나 졸리는데.”

“그래 자거라. 엄마가 다 기워 놓을 테니까.”

“아함! 졸려! 나 잔다.”

그리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책상 위에 콩주머니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우와! 예쁘다. 어? 이건?”

그 옆에 색동 콩주머니 한 개가 있었다. 할머니가 늘 만지작거리던 콩주머니였다.

나는 콩주머니를 볼에 비비며 할머니 냄새를 맡았다. 소중하게 서랍에 넣어두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거다.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콩주머니를 가지고 동네 큰 마당으로 갔다. 아이들이 벌써

나와 있었다. 나는 여자아이들 틈을 기웃거렸다.

“넌, 여기 왜 왔어? 남자아이들하고만 놀아야 하잖아?”

미례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미례는 휠체어를 탔지만 당당했다.

“나도 할 수 있거든. 나도 콩주머니 있어.”

“정말? 그럼, 우리랑 같이 놀 수 있어?”

정인이가 다가오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럼, 콩주머니 공중 돌리기 시합하는 게 어때?”

미례가 자신 있게 제안했다.

“좋았어!”

나는 놀이라면 뭐든 자신 있다. 셋이 동시에 콩주머니 공중 돌리기로 결정했다.

“‘삼천리강산에’노래에 맞춰 콩주머니 공중 돌리기다.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동

안 콩주머니를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주야가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서며 규율까지 정했다.

“자, 준비됐어?”

나는 처음 하는 시합이라 약간 긴장되었다. 미례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미례는 서

울 친구들과 콩주머니 돌리기 최고였다고 했다. 정인이도 자신 있어 보였다. 아이

들이 구경하려고 몰려왔다. 강철이가 와서 내게 항의했다.

“수지 너 제기차기하기로 되어 있잖아? 어제 잃은 것 되찾아야 한단 말이야. 넌 우

리랑 놀아야지 여자아이들과 놀면 안 되지?”

“나 콩주머니 다 따고 갈 테니까 제기 다 잃지 않으려면 연습하고 있어.”

나는 강철이를 따돌리려고 한 소리였다. 그런데,

“웃기네. 네가 내걸 다 딴다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미례가 나를 쏘아붙였다. 장애우라고 봐주려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

데 너무 당당해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저걸 내가 다 따야겠어. 절대 봐 주기 없기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자자, 그만하고 노래 부르면 동시에 두 개부터 시작이다.”

주야가 언니처럼 다그쳤다.


“자, 노래 부르면 시작이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하나둘 셋!>

공 여섯 개가 동시에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났다. 셋

다 살아남았다.

“와, 짝짝! 역시 수지네.”

강철이 녀석이 제기는 많이 잃어도 여태 함께 놀았던 정이 있었는지 나를 응원했

다.

“다음은 세 개로 시작이다.”

시작하자마자 정인이가 먼저 콩주머니 한 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인이 탈락!”

미례와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미례는 휠체어에 앉아서 잘도 돌렸다. 내가 봐주

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위태로웠다.

“연장전에서 이기는 사람이 두 사람 콩주머니 열 개를 다 가진다. 자, 시작이다.”

주야가 노래를 한 박자 빠르게 불렀다.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구경하는 아이들이

숨을 죽였다. 나도 숨을 멈추고 콩주머니를 공중으로 날렸다. 2절까지 연장인데도

둘 다 죽지 않았다. 점점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찼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에도 땀이 찼다. 2절 마지막 후렴 부분이다.

“~~~ 하나둘 세……”

“앗!”

미례 목소리가 들렸다. 미례가 콩주머니 한 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콩

주머니를 여유롭게 받았다.

“야홋!”

나는 콩주머니를 공중으로 날렸다. 승리의 피날레다.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나는

여자아이들 놀이까지 장악한 셈이다.

“수지야, 아이들과 놀 때는 말이야…….”

엄마 잔소리에 미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려다가 그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네네, 알았어요. 한 번쯤은 져 주기도 해야 한다는 거요? 괜히 게임이 있는 줄 아

세요? 이기는 거잖아요. 장애우라고 봐주려고 했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 아니야! 아무것도.”

“쯧쯧쯧! 그 열정으로 공부하면 일등 할 긴데…….”

“엄마는 또 그 말.”

그 뒤, 나는 남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 놀이에서도 배제되고 말았다. 내가

장애우인 미례를 업신여겼다는 말이 돌았다. 당당히 경쟁했을 뿐인데 말이다.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미례가 오기 전에는 여자아이들이 나와 놀지 못해서 안달이었는

데.

그러던 어느 날 마을 회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유리창을 통해 미례가 콩주머니 돌

리기를 하는 게 보였다.

‘어?’

할머니들이 콩주머니를 들고 미례를 따라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참 동안 창문

너머로 구경했다. 미례는 콩주머니 다섯 개도 자유자재로 돌렸다.

“할머니! 처음에는 두 개로 돌리기를 할 거에요. 이 콩주머니 놀이는 치매 예방에

아주 좋은 놀이래요. 그리고 뇌 운동에 도움도 되고, 팔 근육, 다리 근육까지 키울

수 있대요. 추운 겨울에 실내에서 하기에 딱 좋은 놀이에요.”


콩주머니를 잘 돌리는 할머니도 있었지만, 어떤 할머니는 한 개도 못 하고 떨어뜨

렸다.

“하하, 어릴 때 많이 했는데 이제 늙어서 잘 안되네.”

“잘하시는데요. 잘할 수 있어요.”

미례는 할머니들을 칭찬했다. 우리 할머니가 만지작거리던 콩주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치매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던 것이 제

일 슬펐다. 할머니는 나를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했다. 나는 뒷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들어갔다.

“어? 수지야!”

미례가 나를 보고 놀랐다.

“어서 와! 수지야!”

“……!”

“2년 전에 돌아가신 순애 할머니 손녀네.”

한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를 기억했다. 할머니들이 손뼉을 쳤다.

“할머니, 수지 콩주머니 돌리기 참 잘해요. 수지 묘기를 보고 싶으시죠?”

“예!”

할머니들은 아이같이 대답했다. 미례가‘할 거지?’하고 눈빛을 보냈다. 나는 미례에

게 압도당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천리강산에’ 노래 아시죠? 다 함께 불러요.”

할머니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세 번이나 부를 때까지 콩

주머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하! 우리가 유년으로 돌아간 것 같네!”

할머니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나와 미례는 마주 보고 웃었다. 할머니들이 어린 시

절을 떠올리는지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주책스럽게 눈물이 왜 나지?”

“하하, 호호!”

한 할머니 말에 마을회관 지붕이 들썩거렸다. 나는 놀이에서 이기는 데만 열을 올

렸던 것이 부끄러웠다. 나도 할머니들에게 동화책을 읽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

다. 우리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하늘나라에서는 할머니 강아지 수지 기억하시죠?’

나는 할머니들 몰래 눈물을 훔치며 속으로 말했다. 미례의 예쁜 마음에 더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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