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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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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8-01 07:08 조회8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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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향


미안합니다. 당신을 위한 꽃은 없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사랑한다 말해줘요, 한평생 사랑은 나와만 나누겠다고 말해줘요”라고 노래하던 당신을 위한 꽃다발은 없습니다. "날 위해 노래를 불러줘"라 소리치는 남자 앞에서 영혼을 불살라 노래한 당신은 네 번의 커튼콜을 받았습니다. 네 번의 커튼콜로도 다 주지 못한 찬사를, 나는 쏟아지는 환호 속에 빛나는 당신의 눈동자 위에 바쳤습니다. “더 이상의 뮤지컬은 없다, 더 이상의 크리스틴도 없다. 당신이 최고다." 라구요. 그러고는 들고 간 꽃다발은 당신 아닌 에릭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왜 나는 당신 아닌 가면의 남자, 에릭에게 꽃다발을 받친 걸까요?.


사랑스러운 크리스틴! 

내가 당신을 직접 만난 건 2017년 8월입니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읽으며 사랑이 싹텄고 영화를 보면서 사랑에 빠진 내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당신을 만났습니다. 뮤지컬은 폐허가 된 오페라 극장에서 과거 오페라  극장에서 사용했던 소품들을 경매에 붙이는 장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소품들이 팔려나가고 샹들리에가 소개될 때, 불꽃이 튀고 연기가 치솟으며 천장에 매 달려 있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추락했지요. 웅장하고 강렬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시작되던 "The Phantom Of The Opera"… 친절한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았던 영화도, 헤드폰을 쓰고 듣던 DVD의 섬세한 음색도 내 눈앞에서 나비처럼 날아오르던 당신의 목소리를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이 라울과 부르던 사랑의 노래"  All I ask of you "를 들으며 나는 라울의 연인이 되었고, 지하 미궁으로 유령을 따라가며 "The Phantom Of The Opera"를 부를 땐 크리스틴이라는 신전을 지어 여신께 경배했지요. 도대체 그 가냘픈 몸 어디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왔을까요.


오케스트라를 뚫고 날아와 꽂히는 목소리와 아름다운 자태, 정말이지 당신이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당신께 꽃을 안기지 못했을까요. 안타깝게도 당신은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팬텀의 지하동굴에서 깨어난 당신은 지난밤 겪었던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I remember"를 불렀지요. 그러고는 순식간에 팬텀의 가면을 벗겨버렸죠. 에릭의 때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궁금증에 못 이겨 가면을 벗겨 버렸습니다. 누구나 덮어두고 싶고, 숨기고 싶은 상처가 있지 않을까요? 아물지 않은 상처는 가만히 놔두어야 합니다. 건드리면 피가 나고 고름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대신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면 상처는 아물고, 그 자리엔 딱정이가 생겨나지요. 딱정이마저 떨어지고 나면 흔적은 남겠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거나 곪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그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봄과 여름을 지난가을 나무가 잎을 떨구고 나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듯, 스스로 가면을 벗어 보일 그때를요.


그렇지만 크리스틴! 나는 당신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흉측한 얼굴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한 에릭의 입술에 키스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단 한번 육신의 언어가 대신하기도 하니까요. 그 한 번의 키스로, 당신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재능과 학식,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해 마음까지 일그러진 에릭은 당신의 키스로 참사랑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용기와 관용입니다. 에릭은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당신을 라울과 함께 보내줍니다. 에릭이 당신을 차지하기 위해 라울을 묶어 두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단지 라울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키스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외모 때문에 평생을 지하 미궁에서 외로움과 고통 속에 숨어 살아야 했던 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키스를 불렀을 것입니다. "세상은 내게 털끝만치의 연민도 나눠 준 적이 없어!"라고 소리치던 유령이 되어버린 에릭을 구원한 건 단 한 번의 키스였습니다. 


혹자는 "오페라의 유령"은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라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 던지던 라울은 끝내 크리스틴과의 사랑을 이루었지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아프지만 놓아준 에릭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승리자입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에릭이 자신의 가면 속에 숨긴 건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라 일그러진 마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가면 속에 일그러진 자신의 초상은 덮어놓고 아름답고 빛나는 부분만을 내 보이며 '이것이 나'인줄 착각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 쓰고 있어 가면이 내 얼굴인지 진짜 내 얼굴이 가면 인지도 모른 체 말입니다.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 입술에 입맞춤한 당신, 당신의 키스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당신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살다 보면,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일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며 깨부수고 마는 악마 같은 행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가면을 씌웁니다. 집착과 광기는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고 마는 소름 끼치는 사건 사고는 매일같이 매스미디어 1면을 차지하고 그런 끔찍한 사건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마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에릭 또한 '사랑한다'는 이유를 들어 라울을 죽이고 당신을 차지할 수 있었지요. 갖고 싶지만,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옆에 둘 수 있지만, 사랑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 놓아줍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신 아닌 에릭의 가슴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던거지요. 사랑을 잃은 남자에게 한 다발의 꽃이 무슨 위로가 되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그래도 나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에릭의 가슴에 꽃다발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키스하겠습니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아름다운 남자, 그 누구도 들여다 봐 주지 않았고, 닦아준 적 없는 그의 눈물을, 백만 번의 키스로 닦아주겠습니다. 


 


P.S.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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