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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를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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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8-14 21:49 조회4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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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향





 KTX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 될까요?. 죽어도 못 잊을 그날의 당신을 만나려면 쌍발 여객기를 전세 내면 그리운 당신께 갈 수 있을까요?. 시속 2448㎞로 날 수 있다는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전세 내어, 가장 행복했던 날이지만 가장 후회로 남은 그날로, 지금 날아갑니다.


그날은 "잠탱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름에 소임을 다 하던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여름 아침이었습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기상, 기상"하시며 잠꾸러기 육 남매의 아침을 깨우시던 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아침이었지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공기에 부스스 눈을 떴지만 나는 다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기억엔 없습니다만 "드디어 우리 집에 평화가 찾아왔군" 했겠지요. 다시 빠진 잠 속에서  누군가 "공주마마 일어나시옵소서" 하는 무수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역시 기억에는 없습니다만 "드디어 내가 공주가 되었군" 했을 겁니다. 그때까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내 답이 "공주" 였으니까요. 꿈이라면 깨지 말고 생시라면 얼른 일어나 공주의 삶을 누려야 하니 확인하려면 눈을 떠야 했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오랫동안 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셨던 걸까요.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겨우 눈을 뜨고 올려다본 엄마는 하얀 원피스를 들어 보이며 "공주마마 어서 입어 보셔야지요" 하셨습니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 가로줄이 드문드문 그려진 원피스였습니다. 멀리서 보면 흰색, 가까이서 봐야 하늘색 가로줄이 보이던 드레스는 신데렐라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왼쪽 가슴에는 같은 천으로 만든 커다란 꽃 한 송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폭이 넓은 치마는 하늘색 리본을 둘러 허리 뒤로 리본을 묶도록 디자인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예쁜 드레스는 난생처음 보았습니다. 만화책에서도 동화책에서도 본 적 없는 최고의 드레스였지요. "눈곱 떨어져 발등 깰라"시는 엄마의 목소리는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눈곱을 떼고 어쩌고 할 틈이 어딨 습니까. 소원, 소원하던 공주 드레스가 눈앞에 펄럭이는데 어찌 세수 먼저 할 수 있겠는지요.  


길이도 품도 컸지만 "꼭 맞아요"를 연발했습니다. 아직은 맞지 않는 풍덩한 드레스를 커다란 나비 리본으로 허리를 묶어 꼭 맞게 해 주셨지요. 손가락을 뻗어 허리 뒤의 리본을 만지며 엄마 화장대 앞에 서서 빙그르르 돌아보았습니다. 세수를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그 시절이었지만 나는 세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내가 공주였으니 무수리를 자처하신 엄마는 수건을 물에 적셔 공주님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긴 머리를 높이 빗어 올려 드레스를 만들고 남은 천으로 또 한 마리의 나비를 달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공주로 변신한 나는 자랑을 해야겠는데 자랑할 그 누구도 없는 집안에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대문 앞으로 나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라도 누군가 나를 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행인들도 자동차들도 지나갔지만 나를 눈여겨봐주는이는 없었습니다. 한참을 대문밖에서 서성이다보니 외출했던 아버지와 언니 오빠들이 돌아왔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마라"가 가훈 같은 아버지 밑에서 주말이나 방학엔 반드시 집안일에 총동원 대던 언니 오빠들의 손에 커다란 돌덩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허물어져가던 엄마의 정원을 단장하기 위해 뒷산에서 유괴된 돌이었지요. 돌덩이를 내려놓던 큰언니도 큰오빠도 모두 예쁘다며 드디어 공주마마 된 나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흙 묻은 손을 얼른 씻고서 번쩍 들어 하늘 높이 헹가래를 쳐주셨지요. 옆에 섰던 두 살 위 오빠가 볼멘소리를 했습니다."그거 큰누나 옷 줄인 거네" 그 순간,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공주마마는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큰언니가 입던 원피스를 뜯어서 만든 것도, 몇 년을 더 입히실 요량으로 넉넉하게 만드셨다는 것도요. 그렇지만 아무도 몰랐으면 했습니다. 늘 언니들이 입던 옷을 물려 입는 불만이 차곡차곡 쌓였던 나는 어느 날 엄마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새 옷을 사주지 않으면 밥도 안 먹고 학교도 안 가겠다고요. 병약했던 나의 어린 시절엔 밥 안 먹고 학교 안 가겠다는 것이 큰 무기였습니다. 한 끼는 굶어도 두 끼를 굶거나, 학교를 빠지는 일은 더더욱 싫던 나를 구원해 준 드레스를 작은오빠의 발설로 벗어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세상 서럽게 앙앙 울어버렸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얼마나 속상하고 또 서운하셨을까요. 엄마는 드레스 값도 알아보시고 천값도 알아보셨을 겁니다.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원하는 대로 척척 사주지 못한 엄마는 가끔 재봉틀로 우리들의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솜씨 좋던 엄마는 드레스까지 만들기로 작정하시고 몇 날 며칠 디자인을 생각하고 재봉틀을 돌리셨을 겁니다. 드디어 공주가 되었다고 좋아할 막내를 상상하며 밤잠을 줄여 바느질을 하셨겠지요.  그렇게 지은 드레스를 오빠의 한마디에 벗고 보니 다시 입을 용기도 없고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오래도록 입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내가 다시 입으려고 꺼냈을 때는 너무 작아진 드레스는 지퍼가 올라가지 않았지요.  


작은 오빠는 식구들의 눈총과 나의 미움을 하사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자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오빠는 한국에서 나는 밴쿠버에서 덤덤하게 서로의 안부를 전하지만 긴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튼튼한 밧줄로 묶여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늘 언니들의 옷을 물려 입은 것도 새 신발을 신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막내 값을 하느라 엄마의 마음을 그렇게도 아프게 했습니다. 막내는 막무가내의 준말이었기에 막내의 소임을 하느라 막무가내로 상처를 입히고 막무가내로 살았습니다. 


엄마, 사랑하는 엄마! 

너무 늦었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의 엄마께 무릎 꿇어 용서를 구합니다. 혹시 생각나시는지요? 43년 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그 옛날, 아버지와 두 분만 다녀오신 미국 여행이 미안했던 엄마는 제게 물어보셨지요."넌 어디가 제일가고 싶어?" 제가 대답했지요. "나도 미국, 그리고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떠 오르는 나라 이름은 다 읊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가 다시 한번 그날처럼 물어봐 주신다면 제 대답이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여름 아침요." 그럼 다음은 어디냐고 물으시면, 제 대답이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여름 아침이요."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PS: 엄마 사랑해요.


콩코드(Concorde) :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해 만든 초음속 비행기다. 그러나 순항 속도 마하 2(시속 2448㎞)를 자랑하는 이 여객기는 지나치게 비싼 항공료와 낮은 연비, 과도한 엔진 소음, 환경오염 문제 등으로 2003년 시장에서 퇴출됐다. 초음속 비행은 비행기가 음속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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