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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 폭풍속에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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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지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8-30 07:44 조회6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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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향




네가 소리 질렀어. "난 엄마에게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언제나 날 방치했고 죽도록 일만 시켰어"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커피잔 속에 내 눈길을 가두었지. 너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Isn't everything give and take(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당연한 것 아냐)?" 하며 벌떡 일어설 때, 따뜻했던 실내 공기는 순식간에 싸늘히 식어 버렸지.


생각나니?

그날은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이었어. 수없이 많은 곳을 옮겨 다니며 아르바이트일을 하던 끝에 얻은 직장일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사는 게 기쁘다고 했어. 동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잘해 보고 싶어"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네가 환한 얼굴로 커피와 도너스를 사 들고 들어왔지. 도너스를 담은 상자위엔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카드가 붙어 있었어. 내가 제일 먼저 출근하는 요일인걸 알았던 네가 나를 위해 준비 한 커피와 도너스 한 박스는 커피와 도너스 이상의 의미였지. 스물네 살의 넌 학업과 직장일을 병행하느라 늘 지쳐있었어. 그런 네게 커피를 살 마음의 여유와 금전적 여유가 없었어. 난 적잖이 감동했지. 퇴근할 때 주려고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카드와 컵라면 한 박스, 그리고 김치 한통을 꺼내다 주었어. 그까짓 라면 한 박스와 김치 한통을 안고 넌 눈물까지 떨어 트리며"I Love You Mom" 하며 나를 껴안았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감동을 한 걸까. 넌 배가 고팠던 게 아니라 사랑이 고팠던 거였어. 부모님의 이혼으로 홀어머니 밑에 자란 너와 네 동생은 아빠의 사랑도, 경제적인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했어. 방 한 칸도 남겨주지 않고 떠난 아빠와 1년이 멀다 하고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무능력한 엄마도 싫었고 동생만 사랑하는 차별대우가 더 싫었다고 했지. 1년 가까이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딸 같은 네가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어.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넌 늘 배가 고프다고 했지.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너에게 김밥이나 김치, 잡채를 가져다주면 김치는 국물까지 다 먹어 버리고 잡채 위에 뿌린 깨 한알까지 깨끗하게 먹었지. "누구든 배는 고프지 말아야 해" 그게 내 신조였어. 나는 김치를 퍼 나르고 김밥과 잡채를 만들었어. 그렇게 딸처럼 엄마처럼 커피도 김밥도 주고받는 가까운 동료였지.


너와 나 단 둘만 있을 땐 넌 나를 "mom"이라 불렀어. 나도 그렇게 감겨오는 네가 좋았어. 그런 사이였기에 난 잠시 내 자리를 착각했나 봐. 네가 내손에 커피를 쥐어줄 때 나는 그만 선을 넘고 말았지. "네 엄마에게도 선물했지?"하고 물었고 넌 "내 엄마는 선물 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했어. 난 한마디 더 덧붙였지. "네가 알지 못하는 엄마의 아픔도 있어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너를 아빠에게 보내지 않고 널 품고 살았겠어" 했지. 그러자 넌 도저히 내 입이나 글로 옮길 수 없는 단어를 꺼내 네 엄마를 모욕했어. 갑자기 폭발한 너는 쌓인 울분을 토해 내었어. "낳았다고 다 부모야, 엄마면 다 같은 엄마야, 난 내 부모에게 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 엄만 늘 동생만 사랑했고, 난 죽도록 일만 했어"라고 언성을 높였지. 나는 상처 입은 한 마리 들짐승의 포효를 가만가만 듣고 있었어. 그 일이 있고 몇 주후, 너는 새 삶을 살겠다며 남자 친구를 따라 토론토로 이사를 갔어.


듣고 있니?

많이 늦었지만 사과할게. 그때 난 너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너를 더 품어줘야 했어.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방치와 차별대우로 생긴 분노조절 장애가 있던 너를 그냥 좀 더 안아주면 되는 거였어. 언젠가 친구 농장에서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걸 보았지. 다른 닭들이 밖에 나와 모이를 먹고 지렁이를 잡아먹으며 노는 동안 어미닭은 그 좁은 닭장 속에 꼼짝없이 알을 안고 있었어. 친구 말이 하루에 한두 번 먹고 용번을 보는 것 외엔 놀지도 자지도 않고 알을 품는다고 하더군. 그때 알았지. '어미 자리는 품는 자리구나, 품는다는 건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구나' 하고.... 비록 네가 나를 장난 삼아 "mom"이라 불렀을지언정 '내 자리는 어미 자리였구나' 하고 생각했지.


보고 싶은 라일라!

며칠 전,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 Nathanael Matanick의 "ReMoved"를 봤어. 아홉 살 소녀 조이(Zoe)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어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22분 45초짜리 영화야. 주인공 조이는 어린 시절, 부모와 사회로부터 겪은 학대와 방치를 그럴 수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서술해. 너도 경험했겠지만 여름방학을 앞두고 이 나라에선 "Year Book"에 남길 학생들의 증명사진을 찍잖아? 그 과정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원치 않는 존재입니다. 내 과거가 나를 정의해요, 이게 나예요."라고 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증명사진을 사진을 찍는 아이가 자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할 때 '조이는 죽고 싶었겠구나' 생각했어. 죽고 싶다는 말이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듯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가 아닌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봐 달라는 절규였지.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던 조이의 절규를 듣는 이가 나타나게 돼. 여러 번 옮겨 다닌끝에 찾은 위탁가정에서 만난 가이라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조이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이기도 해. 어느 날 밤 "오즈의 마법사"를 읽던 조이가 "도로시는 도망가려고 해요. 하지만 폭풍은 못 도망치게 막죠, 그녀는 계속 돌고 돌죠"라고 해. 그 말을 듣고 있던 가이라 선생님은 "항상 도망쳐서는 안 돼, 어쩔 땐 폭풍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해"하며 조이가 그린 회오리 중심부를 바라보며 얘기하시지."넌 여기 있어, 폭풍이 몰아치는  한가운데, 넌 이 폭풍이 너의 마음을 찢게 놔두던지, 혹은 너에게 일어난 일들이 너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놔두던지 네 엄마의  이야기가 네 이야기일 필요는 없어, 너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어, 그걸 기억해!"라고.


조이와 동생이 위탁가정을 옮겨 다니게 된 건 아빠인지 엄마의 남자 친구인지 늘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남자가 경찰관에게 체포되어가면서부터야. 엄마는 남매를 돌보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당국이 엄마로부터 분리한 남매를 위탁가정으로 보내게 된 거지. 불행에 불행이 더해지며 아이들은 각자 다른 위탁가정을 떠 돌게 되고 어린 남매의 고통과 불안 분노는 배가 되지. 조이의 고통이 뭔지 소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를 파악한 가이라 선생님은 동생까지 데려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사랑을 쏟았어.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밤, 조이가 동생에게 말해. "그거 알아? 우주 폭풍이 진짜 있다는 걸? 별이 태어날 때는 폭풍 속에서 태어난데, 몰아치는 비바람 안에서, 진짜 위험해,  별들은 진짜 힘들게 살아남아, 하지만 폭풍이 질 때는 별은 완전히 진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는 네가 있어 그리고 나도, 우리는  별이야, 엄청나지 않아?라고. 그렇게 조금씩 치유되며 성장한 조이는 과거의 상처를 벗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태어나게 돼. 자신이 겪은 폭풍처럼, 폭풍 속에 갇힌 아이들을 품으며 빛을 발하는 조이는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어 어둠 속에 웅크린 아이들을 품는 따뜻한 선생님이 된거지.


보고 있니, 라일라?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들을.  오늘 밤엔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내 방을 들여다보고 있어. 저 별도 우주 폭풍을 뚫고 어렵게 살아남아 반짝이는 거겠지? 나는 그 별 위에 검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글자를 새기고 있어. 지금쯤, 휘몰아치는 폭풍을 이겨내고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을 것 같은 너의 이름"라일라"를….



PS: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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